날이 밝았다. 지난밤, 지슬의 도움으로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당장 피해서 될 일인가, 약간의 의문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오른쪽 어깨가 찢어질 듯 통증이 몰려왔다. 팔을 마음대로 들기 힘들 정도였고, 그 여파는 온몸 구석구석 파고들었다.“이디 고마이 이십서.”지슬이 다가와 물을 건넸다. 바짝 마른 입술부터 적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로 쌓아올린 담과 그 너머의 바다, 처음 탐라에 왔을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맑은 하늘에 잔잔히 부서지는 파도, 나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완전히 멈춰있을 수
바람과도 같았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김방경과 김통정의 움직임이. 한은 칼을 쥐고, 한쪽은 칼을 놓았지만 누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밀리진 않았다. 오히려 맨손인 방경이 더 상황을 이끌어가는 듯했다.“이쯤에서 포기하거라.”“나라를 살리는 데 포기는 없다. 지금은 네놈 목숨을 거두고 싶을 뿐.”“정녕 나라를 생각했다면 백성을 사지로 몰지 않을 것이다.”“백성을 오랑캐에 내놓은 건, 네놈들이다. 말이 많구나!”김통정이 휘두른 칼끝이 바람을 날카롭게 갈랐다. 이를 보던 고려군사들이 순간 움찔했으나 선뜻 나서진 않았다. 분명 누구라도 하나
땅이 진동하였다. 비단 이곳을 장악한 고려군의 발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방경 앞에 쓰러진 고려군사가 외친 것처럼, 성 밖으로 거대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순간, 고려군은 각자 자리에서 석상이 된 듯 멈추었다. 새파란 하늘을 세찬 비와 같은 화살이 드리우자 그제야 허둥지둥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기습이다, 기습!”쏟아지는 화살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고려군은 하나둘씩, 몸을 피하려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김방경조차도 아슬아슬하게 화살을 걷어내며 주변 군사들부터 살펴보았다. 각자 몸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으나 이들이 지른 불 때문
죽음과 고통 사이에서 난 고민할 것도 없었다. 결론이 똑같다면 굳이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스스로 극단의 결론을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턱은 당장에라도 으스러질 듯, 그의 손에 꽉 잡혀 있었다. 만약 여기서 숨을 멎는다면 다른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고통 때문일 것이다. 이를 곽 깨물고 얼굴을 흔들었다.“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얼굴을 조금 돌린다고 팔다리에 묶인 줄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에 통증만 더했을 뿐. 하지만 턱을 붙잡은 손이 떨어지기도 했다. 눈동자를 위쪽으로 올렸다
창은 정확히 성벽에 내리꽂혔다. 그것도 홍다구 바로 아래에. 몽골군들이 갑자기 성벽에 쏟아지듯 올라섰고, 홍다구는 그 뒤로 슬쩍 몸을 숨기고 말았다. 고려군은 김방경의 호령 아래 성문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성문을 돌파하라!”김방경이 손짓하자 고려군은 마치 자신이 바윗덩어리라도 된 듯 번개처럼 성문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절대 꿈쩍하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성문이 흔들리는 것을. 어떠한 기구도 없이 오로지 군사들의 몸으로만 해낸 것이었다. 성벽 위에서는 화살과 돌, 창들이 비처럼 쏟아졌
땅이 울렸다. 김방경은 말고삐를 꽉 붙잡았고, 난 그의 뒤에 바짝 붙었다. 날이 선 바람이 얼굴을 스치웠지만. 그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상관치 않았다. 지금은 그저 돌아가야만 했다. 목이 타들어 가고, 가슴이 조여왔다.까마귀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찢을 때쯤, 저 멀리 성이 보였다.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허공에서 날갯짓과 함께 울부짖고 있었다.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땐, 몽골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려군이 주변에 심은 나무처럼 자리를 꼿꼿하게 지키고 있었을 뿐.“당장 성으로 들어가야 한다!”김방경이 군
말은 빠르게 내달렸다. 고삐를 꽉 쥔, 고려군 부장의 허리에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김방경과 수하들 몇몇도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성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성문 앞에 불길은 치솟았지만 군사들이 그곳을 넘지 못하였다.어둠 속으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었다. 단순히 우리 머리 위를 뒤덮은 나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에서 다가오는 바람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혀끝은 갈라질 듯 바짝 말라 있었다. 이미 양쪽 다리는 허공에서 힘없이 말 옆구리만 두드려댈 뿐이었다. 한참을 내달렸지만 변한
바람이 바뀌었다. 언뜻 느끼기엔 조금 전과 차이는 없을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건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만큼은 아니었다. 성벽을 등에 지고 우리 쪽으로 향하는 제법 무거운 바람이었다. “때가 되었다.”김방경이 칼을 빼들었다. 곧바로 진군을 명하였다. 그와 동시에 성벽 위로 삼별초 군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수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이 사방으로 포진해 있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눈 한 번 끔뻑이지 않았다. 고려군의 움직임에 소란스러워진 건, 몽골군 진영이었다. 그쪽에서 군사 하나가 말을
바람은 멈추었다, 방금 지나친 화살과 함께. 허나, 또 다른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우리 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군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웃음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몽골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알 수 없을 화살이 빠르게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제법 예리하여, 그저 허투루 지나친 것이 없었다. 한 발에 한 사람, 우리를 손바닥을 두고 꿰보듯 정확하기까지 하였다. 일단 난 얼른 나무 뒤로 몸을 숨기었다. 그러나 이미 이쪽으로도 쓰러진 군사들이 서넛은 되었다. 별 수 없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이
달렸다, 조금도 쉬지 않고. 몽골군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멈춰 있었다. 잠시 전열을 정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러기엔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 아니던가. 물론 삼별초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날은 여전히 어두웠고, 어디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주변은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움직임에 잠시 집중하였다. 그래봐야, 횃불과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전부였지만.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아직 몽골군이 나아가지 않은 방향에서 제법 많은 무리가 쏟아지듯
소문의 진상은 김방경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참이든 거짓이든 고려군사들의 동요가 일어난 게 더 문제였다. 진작 성을 함락해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질 않았다. 직접 나서겠다는 김방경을 수하들이 극구 말리기 일쑤였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사이 소문에 소문을 덧대어 군사들을 더욱더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몇몇은 군영을 이탈해서 아예 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하루 사이에 김방경의 얼굴은 밤낮없이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다. 그동안 몽골군 쪽에서는 공식적인 반응이 없었다. 다만 여러 소문 중 하나가, 몽
칼은 흔들렸지만 김방경의 눈빛은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얼굴과 눈,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건 홍다구였다. 칼을 쥔 팔목에는 핏대가 터질 듯 튀어나왔다. 이대로 칼이 김방경의 목으로 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그러나 누구도 선뜻 각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고려군은 온몸이 묶이긴 했으나 저항할 기세를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 고려군 중에서 온전히 김방경을 살펴보는 건 내가 유일했다. 점점 메말라가는 입술을 혀끝으로 조금씩 축이며 일단 지켜보고 있었다.“모든 건,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불을 지폈다, 삼별초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유일한 성문에. 누가 봐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직접 명을 내린 김방경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다른 방도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몽골군이 원하는 대로 계속 병력을 투입했다가는 성문은커녕 고려군 전체가 무너지리라는 판단이 있었다. 우회로 진입하는 방안도 검토해보았으나, 이곳은 요새였다. 지형 자체가 다른 곳으로는 쉽사리 진입할 수 없었고. 특히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삼별초는 이쪽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삼별초의 내부는 살펴볼 수 없었다.고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흙과 핏기로 시커메진 얼굴과 달리 눈망울이 맑았다. 마치 깊은 호수에 빠져든 것처럼. 잠시 멍하게 하는 사람을 멍하게 하는 기운이 서려있었다. 그 눈이 점점 붉어지더니 눈물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깊고 맑았던 눈망울은 어느덧 뿌옇게 번지고 말았다.“죽입써.”아이가 내 팔을 붙들었다. 아니, 살려고 여기까지 들어온 게 아니었던가? 어찌 저 어린것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건지. 옆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김방경이 눈짓과 함께 조용히 바깥으로 물러났다. 마침 내 옆에는 김방경이 슬쩍 내려놓은 칼이
홍다구,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방경의 목에 겨눈 칼자루를 더욱더 꽉 쥐었다. 뻘건 핏기가 드러났다. 얼굴이 시뻘게진 김방경은 잠시 주먹을 쥐었지만 다시 심호흡과 함께 눈만 질끈 감았다, “여기서 많은 희생을 원하지 않습니다.”“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다.”“성벽은 무너뜨려서 넘는 게 아닙니다.”“네놈이 감히 나를 가르치는 게냐!”두 사람의 대화에 몽골군과 고려군의 모든 시선이 모여들었다. 대화를 이어갈수록 김방경은 목소리가 차분해졌고. 반면 홍다구는 점점 눈을 시뻘겋게 끓어올렸다. 오히려 옆에 있는 몽골군 군사들이
김방경 옆에서 웃는 자는 바로 홍다구였다. 몽골군의 장수, 하지만 고려 사람이었다. 물론 본인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조정에서 그의 아비는 한 번씩 거론되곤 했다. 몽골이 고려에 쳐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물론 그의 아비는 나라를 팔아먹은 짓을 죽음으로 사죄 당하였으나.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홍다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몽골군에 절대 충성하여, 결국 고려가 복종할 상황까지 일조한 건 사실이었다. 진도에서 삼별초가 세운 왕을 처단한 자이기도 했다. 물론 반군이었지만, 고려 왕실의 일원이었다. 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최소한 이곳에선 고려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서 칼을 뽑아야 하는 건, 고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땅을 지켜야 내야만 고려도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을 터. 김방경과 내 생각이 다르지 않음에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우린 탐라를 지켜내지 않을 걸세.”내게 칼을 건네자마자 김방경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하들은 그의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금세 군영 한가운데 군사들이 모두 집결하였다. 그중에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서 있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저 멀리 지슬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삼별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고려군과 몽골군의 것이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삼별초의 깃발이 색이 바랄 정도로 온전히 자리를 지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려군과 몽골군의 깃발은 다정한 듯 은근히 견제하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군영에는 낯선 차림의 군사들이 보였다. 몽골군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흘겨보더니 자신들만의 말로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박장대소하며 사라지는 게 아니던가.그들이 사라지자 고려군이 기다렸다는 듯 지나쳤다. 분명 두 나라 군사들이 한 곳에 있었지만. 일단 오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심지어 서로
지슬이었다. 분명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일단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여전히 대피하는 인파로 소란스러웠다.“가게 마씸!”그의 목소리에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은 없었지만 나를 이끄는 그의 손을 의지하였다. 그러나 성주청 바깥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삼별초. 김통정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정비하였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모두 막아내기 시작했다. 억지로 뚫고 지나가려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창대로 내리쳤고. 그걸로도 제압되지 않으면 곧장 창을
“오랑캐에 복종한 자, 참수로 나라의 기강을 다스리겠다!”그랬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오히려 그동안 저 얘기를 듣지 않은 날들이 신기할 정도였으니까. 온몸이 줄에 묶여 무릎 꿇으며 판결을 차분히 들었다. 숨이 가빠진다거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린다거나 땀이 주욱 흐르진 않았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나와 같이 재판을 받은 자들의 낯빛은 전혀 아니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리거나 아예 검게 물들어버리거나. 아예 터질 듯 빨개져서 알 수 없는 말로 괴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물론 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