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에 상륙한 삼별초는 먼저 주변 마을부터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주민들은 대체로 삼별초의 등장을 놀라워하지 않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은 징집의 두려움 때문일까, 애써 자취를 감추려는 눈치였고 노인들은 누구보다 반겼다. 오랑캐에 무릎 꿇은 고려군보다 끝까지 맞서는 삼별초가 진짜 고려의 정체성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해안을 따라서 진도 곳곳이 차근차근 삼별초의 세력권으로 변해갔다. 어떤 곳은 삼별초 군사들이 직접 가지 않아도 알아서 마을의 대표자가 찾아오기도 했다. 금세 용장산성만 빼고 진도 전체가 삼별초의 영향력에 들어오고 말았다.
지난한 항해와 달리, 전투로 변할 때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김통정의 호령이면 군함에 모인 자들이 모두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분명 우리 눈앞엔 결코 적지 않은, 어쩌면 뿌옇게 서린 안개너머로 더 많을지도 모를 상대편 군함이 미리 진을 치고 있었다.하필 내가 탄 군함이 가장 앞서서 저들에게 돌진하였는데, 맞은편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금세 불기운을 품은 화살이 안개 속을 뚫고 날아들기 시작했고, 간간히 굵은 창도 만만찮은 기세로 날아들었다. 분명 삼별초 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으나, 멈출 기미는 전혀 드러
지난밤 기억을 애써 떠올렸으나, 애써 지우고만 싶었다. 그러기엔 나와 함께 몸을 일으킨 여인의 눈빛이 너무나도 그윽하여, 오히려 선명해지고 말았다. 취기가 온몸에 감돌 즈음, 김통정이 친히 부른 몇몇의 여인 중 한 사람이었다. 술잔을 수차례 비운 뒤에야 김통정은 자리를 비웠고 나와 여인만이 남아 있었다.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괜스레 개경에 있는 처를 떠올린 겐지, 여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향을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거기까지 기억만 겨우 더듬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여인은 그저 나를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의 앞에서 내 의사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굳혔고 함께할 사람들도 제법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굳이 내게 김통정의 친서를 보여준 연유는 무엇이겠는가, 무엇이든 함께하자는 일방적인 통보 아니었을까?그는 탐라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다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딱히 그럴싸한 명분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오랑캐와 고려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만으로 탐라가 큰 영광이 아니겠다는 것. 행여 오래전, 독립된 탐라를 기대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새로운 왕은 탐라 사람이어야 하
새로 지은 건물에는 아랫마을 사람들이 한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족들이었다. 너저분하게 만든 건물은 사람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금세 그럴싸한 모양새를 갖췄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지어지는 족족 하루 이틀 비지 않고 어디선가 사람들이 공간을 채웠다.처음엔 외성과 가까운 아랫마을 사람들만 들여왔다가 점점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 조금 더 아랫마을, 그 옆 마을, 또 그 옆 마을. 점차 바닷가와 가까운 마을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외성과 내성 사이 집들이 거의 꽉 채워질 때쯤부터는 성주청 근
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붉게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비록 우리 중 싸늘하게 식어간 자들도 적지 않았으나, 함께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더 많은 것 자체가 각자 놀라워할 따름이었다.나 역시도 마찬가지, 이번만큼은 이 자리가 마지막일 줄 알았으나 오히려 그동안의 위험한 상황들보다 몸뚱이 하나만큼은 너무나도 멀쩡한 축에 속했다. 팔다리에 묻은 붉게 물든 흙먼지만이 조금 전까지 상황을 대변할 뿐이었다.우리는 상황을 살피면서 먼저 떠난 자들을 한 곳으로 조심스럽게 모셔두었다. 당장 간단하게라도 넋을 달래주자는 의견도 있
땅에 미세한 울림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바로 성벽 너머로 어떤 자들이 당도하였는지를. 누구도 먼저 입 밖으로 저들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는 눈짓과 손짓 하나면 충분했다. 내 옆에서 한숨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정작 눈앞에 삼별초 부대가 드러나자 손끝부터 떨기 시작했다. 분명 성벽 하나면 누구라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어째 모든 병력을 끌어모은 거 같지 않소이까? 그의 말은 과연 일리가 있었다. 그들의 등장은 단순
바로 그였다. 수장을 자처하며 어느 순간부터 여기 사람들 앞에 군림하기 시작한, 바로 그.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원래 무얼했던 자였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나 말고 누구도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건 삼별초 군사들의 발길질에서 벗어나게 해준 그 자체였다. 그것만 해도 당장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살릴 사람이란 희뿌연 믿음 하나가 짙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얘기는 익히 들었소이다, 조정에서 왔다고?”그
감자가 참으로 달았다. 그래서일까, 끼니때마다 우리 앞으로 넘어오는 감자가 점점 줄어들 고 있었다. 이곳에서 늘어나는 건, 사람들 머릿수였다. 숨을 쉬든 그렇지 않든 시간이 흐르는만큼 낯선 얼굴들이 많아진 건 당연한 일상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아갔다. 내 옆에서 흙과 돌을 건네주던 자들도 벌써 셋이나 바뀌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제대로 눈 인사조차 나눌 여유가 없었다. 팔다리와 허리가 쑤셔서 숨이라도 크게 고를까 싶으면 채찍과 발길질이 가차 없이 날아왔다.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더니 목덜미에 정확히 꽂히고 말았다. 피가 솟구치기도 전에, 대장군은 숨소리조차 내밀지 못 한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디서 나온 화살인지는 당장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소한 나와 함께 온 사람들 중 누군가가 쏜 건 아니었다. 그걸 감히 잠시라도 의심할 새도 없이 주변 나무들 사이에서 화살이 쏟아지듯 나왔고,
김통정, 바로 그였다. 대장군과 함께 있었던 군사들은 그의 앞에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거나, 두 팔이 꽉 묶인 채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대장군은 무장이 풀리고 빈손 차림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옆에 서 있었다. 분명 출정할 때만 해도, 탐라를 넘어 고려, 저 멀리 몽골까지도 나갈 수 있을 기세였지만.머리카락까지 헝클어진 채 온몸을 떨고 있는 모습은, 그
지슬, 그의 모습을 여기서 볼 줄이야. 내 눈을 동그래졌지만 오히려 그는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툭툭 칠 정도로 여유까지 보였다. 안 보던 사이, 입가에 수염이 제법 뒤덮었고. 얼굴은 거무스름했지만. 팔다리와 어깨는 제법 다부지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눈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펜안허우꽈?”그가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편안이든 안녕이든 이곳에 있는 내
사방엔 온통 산으로 뒤덮인 이곳. 군영이란 이름은 붙여놨지만. 글쎄, 어디를 봐도 막사 하나 성한 구석이 없었다. 장군이란 자는 가장 일찍 일어나서 가장 늦게 잠들었지만. 세상사, 어찌 눈만 뜨고 부지런만 떤다 하여 뜻대로 되겠는가.장군은 여기서 하루종일 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하 몇몇과 산속에 들어가더니 짐승과 열매 등등 먹을거리를 챙겨왔고. 나무
파도를 머금은 바닷물은 금세 온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두 손으로 붙들고 있는 건, 파편이 아니라 화살을 맞아 쓰러진 다른 군사였다. 머리 위로 스치는 화살과 파편을 피해 조금씩 움직였다. 제자리를 크게 벗어나진 못 했으나 그나마 날아오는 것들은 가까스로 피했다.조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배의 반쪽은 이미 바닷물에 잠겼고. 그나마 남은 반쪽도 불길에 휩싸
그날은 바람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한동안 군사들이 성주청보다 성 밖 해안을 자주 오가더니 금세 군함 한 척이 완성됐다고 했다. 한 척이 완성되자 두 척, 세 척까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열 척을 넘길 때쯤, 어느덧 삼별초와 뜻을 함께하는 군사들의 수가 곱절 이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도대체 이들은 탐라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김통정과 삼별초 수뇌부들은
조금 전에 나갔던 군사들이 다시 안으로 들이닥쳤다. 분명 단검을 내려다보며 떨던 자들이었건만. 당장 밖으로 나오라며 칼부터 들이미는 게 아니었던가. 나랑 함께 있던 자도 별다른 수 없이 칼끝에 등 떠밀려 바깥으로 나왔다. 횃불을 든 군사들 한가운데에 방금 나를 부른, 김통정이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함께 있던 자와 번갈아 쳐다
내게서 통을 건네받은 김통정은 곧장 뚜껑부터 열었다. 그 속에는 아직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가락이 있었다. 그 옆에 서찰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던 김통정의 입가엔 미소가 스며들었다.“가지를 쳐내기보다 꽃을 피워오셨구려.”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김통정은 서찰과 통을 챙기더니 조용히 처소로 들어갔다. 날이 밝으면서 지난밤까지
그 칼은 자연스럽게 내 손에 올라와 있었다. 곧이어 김통정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나무가 올곧게 자라려면 쓸데없는 가지는 과감히 쳐내야 한다며. 때로는 그 가지가 자신이 쓸데없을 줄은 절대 모를 수도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도대체 내게 무얼 원하는지 물었다.“그저 우연히 가지를 쳐내길 바랄 뿐이오.”김통정, 그가 바라보는 방향은 다름 아닌 이문경이 주둔한
사람들은 모두 외쳤다. 새로운 전하가 즉위하셨노라고. 천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하나로 모여 김통정의 주위에 둘러쌌다. 그것도 잠시, 이문경이 갑자기 일어나서 두 팔을 번쩍 올리던, 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금세 성주청은 만세라는 함성이 가득 채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일단 두 팔을 들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곁눈질로 슬쩍 내다보니, 그는 눈을 지그시
그의 허리를 지키는 칼에 난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고려군과 그에 동조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 대부분 투항과 동시에 전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중 고여림과 김수의 수족 같은 몇몇은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어찌할 것이냐?내 손등을 꽉 붙잡은 김통정의 손아귀에 힘이 한껏 실렸다. 옆에서 내려다보는 이문경의 눈에도 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