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제주의료원' 맞은편의 A다방을 찾아간다. 지하 다방이 아닌데다가,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 안정감을 줄 뿐 아니라, 병원 앞마당의 해묵은 계수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말의 감회가 젖기가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새 병동을 앉히면서 계수나무와 옛 본관 건물을 남겨둔 모습이 옛날 함흥의 도립병원 건물과 꼭 같다. 그러니까 당시의 최고 의료 기관으로 전국 도청 소재지에 하나씩 세워졌던 것으로 미루어 지금 제주 의료원 본관 건물은 60년의 세월을 그대로 받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A다방에 가면 언제나 계수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 쪽으로 좌석을 잡고 커피를 청한다. 천천히 잔을 비우고 담배를 피워 문다.


1952년이었던가, 애월에서 피난살이를 하면서 계용목 선생의 <신문화>일을 돕기 위해 성내 출입하던 무렵의 일이다.


하루는 칠성로에서 고향의 한 마을 4년 선배인 J씨를 만나게 되었다. 정말 뜻밖에 해후였다.


"이거, 몇 년 만입니까?"


놀라움으로 부여잡고 성급히 선술집을 찾아 나섰던 기억은 아슴푸레한데, 술자리에서 J씨가 꺼냈던 '댄스' 이야기만은 지금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J씨는 흥남 철수 때 단신으로 남하하여, 제주로 건너온다. 그리고 다행이 도립병원 서무과에 일자리를 얻는다. 그런데 이 취직은 북쪽에서 해방 후 한때 정책적으로 댄스를 권장했고, 그 때 배운 왈츠와 탱고 덕분이었다고 한다. 의사들을 비롯한 직원들이 '춤선생'이 필요했고, 북쪽에서 익힌 춤솜씨 때문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해후가 있었던 바로 뒤어 필자는 군에 몸담게 되어 제주에서 J씨를 다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그리고는 환도 후에 재취하여 아들 하나를 둔 J씨를 서울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셋집을 구해 다니다 보니 녹번동에서 이웃사이가 된 것이다.


소주와 바둑으로 함께 보낸 2년여의 세월이었는데, 하루는 J씨가 도립병원때 이야기를 해서 다시 웃음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병원 창고에 난방용 숯섬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같은 서무과의 L씨와 둘이서 숯을 훔쳐내기 시작했다. 소주 생각이 간절하여 숯섬 하나에 10분의 1정도씩만 축내기로 했는데, 손 붙임이 거듭되다 보니 3분의 1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도의회 감사에 걸려들었다. 진퇴유곡, 유치장 신세까지 각오했었는데, K의원의 도움으로 요행이 살았다는 것이다.


"K도 내게 왈츠를 배운 사람이었거든요...."


8년 전이었던가, J씨가 타계한 4년 후의 일이다. 칠성로 P다방에서 우연히 J씨와 숯을 훔쳐냈다는 L씨를 만났다. 도립병원 때의 숯 이야기를 비쳤더니,


"애교로 봐줄 수 있는 도둑질 아닐까요. 세상 모두가 도둑놈 판인데...."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생존해 있었으면 고희를 맞았을 J씨. 북쪽에 있을 부인과 살붙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미루나무 가로수 길의 우리 마을은 다가오는 추석 때문일까, 묘하게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몇 해 전, '제주의료원'은 '제주대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찻집에 가면 늘 바라보던 본관 건물이 헐리고 세 건물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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