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구기 스포츠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88서울올림픽 대표팀 감독, 국내 첫 여성 태릉선수촌장.

이에리사(58) 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광복 후 가장 성공한 체육인 중 한 명이다. 현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1970년대에는 지금의 김연아나 손연재를 뛰어 넘는 인기를 누렸다.

탁구채 하나로 전국민에게 기쁨을 선사한 이에리사는 행정가로 변신한 뒤 체육인들의 복지 향상에 앞장섰다. 현재는 국회의원으로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15환이 바꾼 운명

이 의원은 3남5녀 중 막내다. 1954년 막내딸을 받아든 아버지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서 본 따 에리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지금도 흔치 않은 이름인데 당시에는 어땠을까.

그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부끄러워 이름표를 숨길 정도였다. 선생님이 지나가실 때만 이름표를 급하게 달고 나머지 시간에는 떼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세련돼 좋다"며 웃었다.

탁구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던 것은 충남 대덕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의 도움이 컸다. 이에리사는 학교가 끝나면 탁구대가 있는 관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혼자 벽에 공을 치면서 놀던 그는 세뱃돈을 받자 곧장 문방구로 달려가 15환을 주고 탁구채를 구입했다. 탁구 인생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이 의원은 "탁구채 구입 후 학교 특활반에서 본격적으로 배우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선수로 뛰고 싶은 마음이 들어 탁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전중 탁구부 소속이던 오빠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탁구를 습득했다. 어린 나이에 남자들의 거친 탁구를 익힌 것은 훗날 큰 도움이 됐다.

"물 달라고 하면 물을 떠다 주고 공 주워 달라고 하면 공을 주워주면서 탁구장에서 살았다. 노래를 시키면 오빠들을 위해 노래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오빠들의 드라이브를 보고 배웠는데 1970년까지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여자 선수는 전국에 나 혼자였다. 오빠들의 훈련을 보고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된 셈이다."

▲1970년대 국민 여동생

탁구계에 이에리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에리사는 제25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 정상에 올랐다. 당시 종합선수권은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눠 치러졌다. 몸 풀듯 학생부 우승을 차지한 그는 대표팀 선수들이 총출동한 일반부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고작 15살 중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종합탁구선수권 우승을 놓치지 않던 그를 대표팀에서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막 19살이 된 1973년 출전한 제32회 사라예보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이에리사를 국민 영웅으로 만들어줬다.

이에리사의 기세는 대단했다. 단체전에 19차례 나서 전승을 거뒀다. 정현숙, 박미라의 힘까지 더해진 한국은 중국, 북한 등을 따돌리고 사상 첫 정상에 등극했다. 해방 후 한국 구기 스포츠가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의원은 "1972년 10월 스웨덴 오픈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세계대회도 해볼만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경기, 한 경기를 거듭하다보니 정말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자신감으로 결승까지 갔고 전승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부담 없이 즐겁게 경기를 했기에 우승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일 우승을 꼭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체전 후 전국민의 시선은 이에리사에게 쏠렸다. 그를 축하하려는 국제전화와 전세계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지나친 관심 때문이었을까. 이에리사는 단체전 하루 뒤 열린 개인전에서는 중도 탈락했다. 당시 국제탁구연맹이 발행한 책자에는 "사라예보 대회의 최대 이변은 한국의 우승이 아닌 이에리사의 개인전 탈락"이라고 적혀 있다. 그만큼 이에리사는 전세계가 인정한 스타였다.

▲'남보다 노력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다'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출전이 북한측의 비자 거부로 무산되자 이에리사는 은퇴를 선언했다.

이에리사는 서울신탁은행 트레이너를 시작으로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올라섰다. 협회 내분이 절정에 달했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간곡한 요청에 재차 지휘봉을 잡아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에리사는 2005년 3월 태릉선수촌장을 통해 본격적인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상 첫 여성 선수촌장이 된 그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우선 그동안 숱한 촌장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훈련 일수와 시설 보수에 과감히 칼을 댔다.

당시 각 종목 대표팀의 태릉선수촌 훈련 가능 일수는 105일이었다. 제대로 된 경기력을 발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수였다. 인기 종목이 비인기 종목의 훈련 일수를 가로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시설의 낙후 상태도 심각했다. 선수들은 오래된 기구로 늘 부상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이 위원은 "선수들과 지도자들의 불만을 접수해 기획재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 105일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1인 시위를 하기도 했고 105일 후 태릉선수촌의 문을 닫아버리겠다는 엄포까지 놓은 결과 200일까지 늘릴 수 있었다. 시설의 개보수는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체육은 문화재이고 선수들은 인간문화재다. 이런 논리로 설득해 지금은 거의 다 신식 시설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직후 촌장직을 내려놓은 이에리사는 지난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을 받고 정치에 입문했다. 선수, 지도자, 행정가에 이은 네 번째 변신이었다.

이 위원은 "여러 직책을 거치면서 체육계 일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는데 촌장을 그만두니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차에 비례대표 제의가 들어와 용기를 냈다. 정치를 한다기보다는 내 일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

초선 의원 이에리사의 국정 활동은 무척 활발하다. 벌써 발의한 법안만 6개나 된다. 대표팀 선수들을 위한 국민체육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과 25세 미만 운동선수 및 연예인이 주류광고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 등이 대표적이다.

이 위원은 선수와 지도자, 행정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노력을 꼽았다. '노력 없는 성공은 없다'는 누구나 아는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싶어했다. 물론 이에리사는 지금도 더 큰 꿈을 위해 노력 중이다.

"선수 때부터 가지고 있는 소신이 있어요. '남보다 노력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다'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탁구를 잘 쳤지만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쉬는 시간을 줄였고 잠 잘 시간에 덜 잤고 놀고 싶을 때 덜 놀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거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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