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4년 2월 22일(음력)제주시 노형동 1231 번지, 즉 '큰 바량밭'에서 연주현씨 시조 담윤(覃胤)공의 28대 손으로 태어났다. 나의 부모님은 첫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잃어 버렸고 딸만 내리 셋을 낳다가 뒤늦게 나를 얻었고, 내 밑으로도 딸 셋을 낳았으나 둘은 잃어버려 1남 4녀를 키웠다.


우리 아버지는 3남 2녀 중 막내였다. 큰아버지에게는 4남 2녀, 중부님은 1남 1녀를 두어 일찌감치 손자들을 보았음에도 우리 아버지만은 아들이없어 기를 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기에 우리 어머니는 몸둘 바를 몰라하던 차에 뒤늦게 나를 낳았으니 그 기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막내였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 집에서 살았었는데 나의 누나들이 마당에서 뛰놀며 떠들면 할아버지께서는 곧잘


" 계집년들이 떠들면 못쓴다!"


하고 야단을 치셨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들 없는 설움을 눈물로 지샜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큰아버지댁 큰사촌형에게는 아들만 셋, 둘째형네는 2남 2녀, 세번째 형은 1남 3녀, 네번째형은 3남 1녀, 중부님댁 사촌형은 2남 2녀를 각각 두어 너나없이 아들손자을 보았으니, 삼촌되는 우리 부모님만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첫아들을 잃은 아픔을 간직한 우리 부모님은 모처럼 얻은 아들에게 탈이 생길까 노심초사하셨고 특히 어머니는 할망당으로, 절간으로, 점쟁이집으로, 심방(무당)집으로 분주히 돌아다니며 기원을 드렸다고 한다. 내가 배탈이 나거나 감기몸살이 걸려도 병원으로 데려갈 생각은 않고 한약국을 경영하는 당숙댁으로 데리고 가 침을 맞게 하고 온 몸 여기저기에 쑥찜질을 하는가 하면 삼방을 집으로 모셔와빌거나 크게 굿판까지 벌였으니, 내가 오히려 시달리고 피곤해서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구나 점쟁이집에 갈때도 나를 데리고 다녔는데 점쟁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를 '탈이거성(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점쟁이 말을 믿는 부모님은 나를 외가집으로 보내어 살게 하는거 하면 절간으로 보내어 살게 하여, 아마도 제주도 4 · 3 사건이 터지지 않았으면 나는 동자승으로 자라 지금쯤은 스님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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