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金緻:1577~1625)는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 본관은 안동(安東). 부사(府使) 김시회(金時晦)의 아들이다.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設書)⋅이조 정랑 등을 거쳐 1609년(광해군 1) 3월에 제주 판관(判官)으로 도임하였고 1610년 9월에 떠났다. 재임 중에 민폐를 개혁하고 선정(善政)하였다. 그 후 1625년(인조 3) 경사도 관찰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이 한라산기는 제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옛 선인들

내 일찍이 한라산이 바다 한가운데 있다 듣고서, 한번 올라 평생 큰 뜻을 품고 유람하려는 바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가히 이뤄 보지 못하였었다. 기유년(1609년:광해군 1) 이른 봄에 내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있었는데, 임금 은혜를 입어 특별히 제주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3월이 지나 비로소 바다를 건넜다. 오면서 한라산을 바라보니 그리 심하게 높지 않고 큰 산과 거대한 기슭이 가로로 한 면을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속으로 말하기를, ⌜세상에서 이른바 영주(瀛洲)라는 것이 곧 이 산이다. 신선 사는 세 개의 산 가운데 하나인데, 어찌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지 않을까? 아니면, 사람 마음이 귀로 듣는 것만 귀하게 여기고 눈으로 보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것일까? 어찌 가서 탐험하고 따져 의혹을 깨뜨리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관(官)에 도임한 지 10여일에, 마침 민응생(閔應生)군과 더불어 얘기가 한라산 경승에 미치자, 민군이 말하기를 “그대가 조만간 틈을 타서 한번 놀러 가신다면, 이 늙은이도 좇아가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신선이 사는 땅은 만나기가 어렵고 사람의 일은 어그러지기 쉽습니다. 관공서 일로 바빠서 거의 틈이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관공서 일을 다 매듭지은 뒤에 취미 생활에 젖
마침내 결단하여 계획을 하였다. 함께 가기로는 민응생 이효성(李孝誠) 정인수(鄭麟壽) 무리들이었다. 말을 타고서 제주 성을 나섰다. 때는 마침 4월 8일이라 하늘에는 비가 처음 개이고 바람과 날씨가 곱고 아름다웠다. 평평한 들은 손바닥 같았고 향기로운 풀들이 덮여 있었다. 물을 따라 철천(鐵川) 가장자리로 말에 의지하여 올랐다. 철쭉과 진달래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 빛을 내고 있었다. 눈 닿는 대로 한가로이 읊조리니 그림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었다. 행로가 20여 리쯤에 이르자 언덕 위에서 쉬었다. 뚝 끊어진 산골짜기를 굽어보니, 골짜기 가득 푸른 수풀이었으며, 짙푸르게 무성하여 가히 사랑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는데, 때가 이미 한낮이었다. 드디어 말을 타고서 산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좁은 길이 뱀과 같이 요리조리 구부러져 있었다. 고죽(苦竹)이 땅에 가득하였고, 키 큰 나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