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8월, 여름 방학을 이용한 '제주도종합학술조사단' 일원으로 참가했을 때 발견한 '표해록漂海錄'은 우리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해양 문학의 백미白眉 라고 할 것이다. 이 작품의 작자는 조선 후기 영조英祖때 생존한 것으로 보이는 장한철張漢喆이라는 유관이고, 소장자는 이제는 고인이 된 전 제주도 '애월상업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장응선씨이다.


이 설명은 정병욱鄭炳昱씨가 번역하여 1979년 범우사에서 간행한 '표해록'의 서언 첫 구절이다.


녹담거사鹿潭居士라는 아호를 쓰던 장한철은 제주도 애월리 출생으로서, 젊어서 향시에 몇 차례 합격하였고, 영조 47년(1771년) '표해록'을 쓴 뒤 4년이 지나 과거에 합격하여 대정大靜현감을 거쳐 강원도 취곡吹谷 현령을 지낸분이다.


기지와 유머로 겁에 질린 표류자들을 이끌어 제주 선비의 기백을 돋보이게한 '표해록'의 줄거리는 이렇다.


영조 46년 12월 25일. 일행 29명(선비 2명, 선원 10명, 장사꾼 15명, 육지상인 2명)이 제주항을 떠난다. 육지에 가까워졌을 때 폭풍을 만나 노어도鷺魚島 근해에서 조난, 3일을 표류하다가 유규의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한다. 거기서 왜구를 만나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다행이 안남安南 상선을 만나 구조를 받는다.


정월 초닷새, 새벽에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고향 산천을 다시 본 일행들은 일시에 통곡을 터뜨리니, 안남인들 80여 명이 중국계 상인들과 대치하여 매우 험악하게 군다. 이유를 알아보니 옛날에 탐라국왕이 안남 태자를 살해했는데, 이제 안남인들의 원수인 제주 사람들을 만났으니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다.


중구계 상인들의 만류로 요행히 죽음을 면하여 상선의 밑창에 싣고 오던 배를 타고 다시 망망대해에 버려진다. 원수끼리 같은 배를 타고 갈 수 없다며 버려진 것이다.


다시 청산도靑山島근해에서 제2차 조난, 마을 사람들의 구조로 일행을 챙겨보니 19명은 물에 빠져 죽고, 살아남은 10명 중 다시 2명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어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8명뿐이었다.


이 책에서 흥미를 돋우게는 것은 청산도에서 벌어진 연애담戀愛談이다. 이 장면을 읽을 적마다 당촌이라는 섬마을을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면 하는 충동을 느낀다.


‥‥저녁때가 되어서 김만련이가 매월과 같이 와 나에게 손님께서 꿈속에 그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애정을 느끼는지 별로 준절이 물리치는 말이 없었으니, 이는 곧 허락하는 거나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밤 그녀의 어머니가 산사山寺에 초례醋禮를 올리러 갔으니, 손님께서 탐화유향하시려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여, 매월을 보고는 이러이러하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날 밤 나는 당촌에 가서 그녀의 집을 뛰어들었다. 창밖의 나지막한 담장 아래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산중에 걸린 달은 이미 기울어져 꽃그늘래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산중에 걸린 달은 이미 기울어져 꽃그늘만 조용히 나풀거렸다. 꽃 아래에 우두커니 서서 매월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밤은 이슥하고, 사방은 잠자는 듯 고요하고, 조그만한 삽살개가 나를 보고 짖어댈 뿐이다. 매월이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는 나를 방 안으로 인도했다. 산골짝의 밝은 달이 창을 비춰 방 안이 환했다.


그녀는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가 놀라 일어나 앉는다. 처음에는 엄숙한 말로 준절히 거절하는것이 도무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은근한 내 이야기를 듣고는 추파를 굴리는 듯 하더니 점점 누그러진다. 혹은 수줍어 하며 교태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짐짓 노한 체하며 마구 욕설을 한다. 죽일 년, 매월이가 나를 팔았구나.


그러나 잠자리에서 서로 기쁨을 나누자 흐뭇해져 성내어 꾸짖던 소리가 뚝 끊어지고, 다정스런 마음이 끓어올라 견딜수 없었다.


흥미진진, 앞뒤의 글을 더 옮겨놓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어머니의 산사 행, 산골짝의 맑은 달빛, 매화나무, '죽일 년 매월이가 나를 팔았구나 '로 승화된... 한국적 로맨스의 전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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