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름은 고은(高隱)이다.


어머니는 제주 고씨 집안, 고두정(高斗正)공의 2남 3녀중 둘째로 태어났다. 애월읍 수산리 당동네에서 태어났지만 외할아버지가 제주시 연동 배두리(지금의 삼무공원)로 옮겨 살게 되자 그 곳에서 시집왔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에게는 '배두릿 장의','배두릿 훈장' 이란 호칭이 주어졌다.


배두리에서 큰 아들을 잃자 고씨 관당이 많이 사는 이호 2동으로 옮겨 사신 외할아버지는 한문서당 훈장도 지냈고, 수운교(水雲敎)를 처음으로 제주에 도입한 두 분 중 한 분이고 지관으로서도 한 몫을 했으며 말년에는 당신께서 돌아가실 날짜까지 예언하신 한학자셨다. 나의 큰 외숙은 결혼하자마자 돌아가셨고, 작은 외숙 고칠종(高七鐘)은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해서 제주농고 선생을 역임하다가 4.3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 시집 와 첫 아들을 낳았지만 득남의 기쁨을 채 느끼기도 전에 죽어 버렸고, 그 뒤로 딸만 낳아 집안 어른들 앞에 얼굴을 못들고 사시다가 나를 낳자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고 한다. 뒤늦게 얻은 아들인 내가 몸이 쇠약하고 자주 아파 한약국, 점쟁이집, 무당 굿, 절간으로 치성드리러 다니다 보니 재산은 축나 버려 집안에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았던 모양이다. 외할아버지가 수운교를 도

4.3사건으로 삶이 어렵게 되어도 수운교에 대한 신심이 강하여 이호동과 도두동에 수운교 교당을 세우는데 적극적으로 힘을 기울여 보살이라는 명칭도 얻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따라 밭에 가면 밭일보다 먼저 밭 주변 길에 널려 있는 작지(자갈)를 치우고 오라 한다. 우리 밭까지 가는 길에 있는 작지만 치우고 밭으로 들어 가는 나에게 우리 밭 주변 길 전부를 치우라며


"우리 밭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편하게 해 주면 그게 다 복이 되어 돌아온다."


고 말해 나로 하여금 사회봉사의 초심을 일깨워 주셨다.


우리 아버지가 막내엿 우리집에는 직접 모시는 제사, 명절이 없었으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 가시자 할머니 제사는 우리집에서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4.3 사건 이후 우리집에는 '가마귀 모르는 제사'가 많아졌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나의 외사촌도 어머니따라 일본으로 밀항하여 가 살지만 아직 어렸으므로 조상 제사를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 우리집에서 그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우리 괸당들도모르게 제사 모시느라 '솔모슴'(조마조마)하며 지냈다. 우리집 선조 벌초는 대가족이 몰려가 함께 하므로 금방 끝나지만 외가 조상 벌초는 아버지, 어머니만 가서 하므로 며칠씩 걸려 고생이 많았다.


내가 성장하고 결혼해서 손자까지 보게 되자 손자들을 당신네 사는 '홀캐'(신사수동)로 데려 갔다가 큰 손자가 바닷물 속으로 기어가는 것을 못 보고 죽일 뻔한 놀람도 겪었고, 금방 걷기 시작한 둘째 손자를 걸음마 시킨답시고 홀캐에서 제주까지 6km이상 걸어오게 함으로써 종아리를 휘게 만들어 나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는


"잘 걸엄쪄, 잘 걸엄쪄 허난 숫붕태라서 뛰어 와라, 게."


하며 계면쩍어하던 모습도 잊지 못하겠다.


말년에 심장병으로 몇 개월 고생하더니 1970년 1월 25일, 큰 어머니 제삿날 파제후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니 두 동서가 사이좋게 나란히 저승으로 가신 모양이다. 어머니 유언에 따라 수운교 예식으로 장사지내고 이호법당에다 고혼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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