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병합과 제주

후삼국을 멸망시킨 고려(高麗)는 처음 탐라까지도 정복하여 완전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탐라를 공략하려면 대 선단의 편성이 불가피 했으며 당시 고려는 그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늘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받

한편 탐라는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하자 그 위세에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938년(태조 21) 12월 탐라 왕 고자견(高自堅)은 태자 말로(末老)를 고려에 입조시켜 방물을 바치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했다. 이에 고려 태조는 신라 때의 예에 따라 고자견(高自堅)에게는 성주(星主)를 양구미(梁具美)에게는 왕자(王子)의 벼슬을 내려 국교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북방정책을 강화해야 할 입장인 고려로서는 남방에 독립해 있는 탐라국이 여러모로 경계의 부담을 주는 존재였음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꾸준히 협상을 추진한 끝에 1105년(숙종 10) 5월 마침내 두 국가의 평화적인 합방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정사의 기록은 물론 자세한 자료를 찾기가 어렵지만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조건은 토주관제도(土州官制度)의 인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 때부터 탐라의 국호가 폐지되고 탐라군(耽羅郡)이 설치되어 여정(麗廷)에서 임명하는 고려의 관리가 수령이 되어 정사를 맡게 되지만 모든 권한이 전임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 때부터 이어온 성주․왕자제도가 그대로 존속되어 또 하나의 지방관부가 병립하게 되었으며 고려의 수령은 중요 정사에 관해서는 그들의 자문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원정치(二元政治)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란이나 소요 사태 등이 일어났을 때는 수령은 성주․왕자의 힘을 빌지 않고는 진압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수령보다는 성주․왕자에게 도민들이 따르고있었다고 할 것이며 그만큼 성주․왕자의 세력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이원정치는 그 뒤 원제국(元帝)의 직속을 거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1153년(毅宗 7) 11월 고려는 행정조직 개편을 단행 탐라군을 탐라현(耽羅縣)으로 개편하여 현령(縣令)을 두도록 하였다. 또 읍호도 개칭하였는데 이 때 비로소 「제주(濟州)의 이름이 생겨났다.

여정은 처음 얼마동안은 탐라령(耽羅令) 선임에 각별히 신중을 기했으므로 어진 목민관들이 도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가정주구(苛政誅求)하는 수령들이 나타나 가뜩이나 불만에 차있던 도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1168년(毅宗 22) 11월 양수(良守) 등의 민란을 시작으로 1202년(神宗 5) 10월 번석(煩石) 등의 민란, 1267년(元宗 8) 봄 (文幸奴) 등의 민란, 1318년(충숙왕 5) 3월 사용(使用) 김성(金成)

이 무렵에 발생했던 민란의 원인은 대체로 ①고려의 영속에 대한 불만 ②수령과 관리들의 폭정에 대한 항거 ③가렴주구 관리들의 축출④고려관리에 영합한 성주․왕자들의 대한 불만 ⑤선량한 관리의 임명요구 등이었다고 한다.

민란이 발생하면 수령이나 고려관리들의 힘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했으며 그 때마다 성주․왕자들의 협력을 얻어 겨우 수습이 가능했다. 민란이 진압되면 그 주동자들을 가려 처형시켰지만 반면에 민중의 요구사항들이 행정에 반영되고 민심수습에 주력하게 되었으므로 그 얼마동안은 평정이 유지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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