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안나 힐티 박사 by Anne Hilty, PhD


제주는 분쟁 이후 갈등의 시기를 거쳐 현재는 적극적으로 힐링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민중 운동 4. 3 사건은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비극으로, 대량학살, 방화로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동굴이나 이와 유사한 곳을 은신처로 대피하는 동시에 수많은 테러와 실종, 의심과 배신이 가득한 불안정한 사회가 되었다(1947-1954년). 책임 소재를 포함하여 구체적인 내용들이 아직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연관된 모든 사람들은 반복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진실과 정의, 배상과 화해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활동가, 연구자, 예술가 및 생존자들과 그의 가족, 희생자 유가족들이 용감하게 투쟁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실로 제주도민중 직, 간접적으로 4. 3사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전국적으로 ‘힐링’이라는 용어가 갑작스레 거대한 물결로 문화에 밀려들었고, 폭넓게 이러한 용어가 적용되고 있긴 하지만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이는 감성적인 상처에 대한 미온한 대처를 바라보는 일종의 각성이라 할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힐링’이란 개념은 한국인에게 매우 낯선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폭발적으로 전국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보다 더 일찍 등장한 ‘웰빙’이란 개념은 육체적 건강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신체적 건강과 더불어 정신적인 건강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지난 2월에 제주 4.3 희생자 및 유가족협의회는 트라우마센터 건립의 필요성을 탐색하고자 정책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통합민주당소속 국회의원 강창일의원이 제주 4.3트라우마센터 건립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고 있다.

광주는 이미 1980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군대의 대량학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외상후 증상을 다루기 위한 트라우마센터가 설립되었다. 4.3 평화재단 총무부차장 오성국씨에 따르면, “광주의 트라우마센터가 자금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고, 자체시설이 아닌, 임대공간을 사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매우 긍정적인 발걸음의 하나로 제주의 모델이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사업을 추진하려면 중앙과 지방정부 차원에서 자금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오성국 차장은 강조했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트라우마가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며, 전형적으로 급성기는 사건이 일어난 후 1-3개월 이내에 지나간다. 그러나 지속적이거나 다수의 사건들을 포함하는 제2유형의 트라우마는 특히 해결하기 어렵고 지속적인 증상을 초래하는 경우가 더 빈번하다.

희생자들의 ‘범죄인’ 지위를 가족들에게까지 부여하여 연좌제 및 이에 대한 토론을 범죄시하는 한편, 정부의 책임회피까지, 사건 이후 반 세기 동안 계속된 정치적 억압은 그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를 덧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힐링을 가로막았다.

‘희생자’와 ‘생존자’의 개념 적용 또한 지나치게 협의적이다. 외상 상해 (traumatization)는 직접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은 ‘최전선’에 있었던 사람들을 훨씬 넘어서 확장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와 테러의 영향은 실제 사건의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이차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예를 들면, 살해되었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도 확대된다.

테러가 난무하는 환경은 어린이, 특히 5세정도의 아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이 나이의 어린이들은 뇌 발달 단계가 코티졸, 아드레날린, 노르에피네프린 등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유입에 아주 민감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감정적 불안정을 초래하며, 자애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과 안전에 대한 핵심적인 감각 발달을 방해하는 이 현상은 흔히  “테러의 신경생물학 (neurobiology of terror)”이라고 언급된다. 지금 60대인 제주사람들 사이에서 이 현상에 극심하게 영향을 받은 나이집단을 찾을 수 있다.

트라우마의 세대간 전이는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개념이다. 심각한 외상 상해를 겪은 후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성인에 의해서 길러지는 어린이들은 사건이 일어난 지 훨씬 지난 후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부모와 똑 같은 심리적 증상들을 겪으며, 우울, 불안, 사회적 공포증, 약물남용 등과 같은 장애가 발생하기 쉽다.

전쟁이나 그 외에 제주사람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지속적인 트라우마의 영향은 완전히 해결하는데 100년- 5세대-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은 분쟁후 사회를 연구하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은 혹독하고 지속적인 트라우마에 직면해서 조차도 회복력이 있다. 이는 극단적인 어려움에서 살아남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그 후유증 속에서도 번창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제주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친 다수의 고난에 직면하여왔으면서도 고도의 적응력과 강한 공동체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그들의 생존에 기여해온 것이다. 다수의 외세 침략뿐만 아니라 육지와 중앙정부의 모욕을 절감하는 고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제주 사람들은 그들 사회 조직 속에서 이와 같은 혹독하고 지속적인 균열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견뎌내게 해준 서로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의지해왔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량학살) 생존자들에 대한 연구가 밝혀 낸 바와 같이, 개인의 회복력은 나이에 따라서 악화된다. 제주에서 특히 취약한 집단은 그 사건 당시 어린이였던 이들에 더하여, 의학분야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80세 이상의 노인들 (old-old)이다. 생애 초기에 트라우마를 겪었지만 회복력이 있었고 아주 잘 활동해왔던 80세 이상의 노인들은 이후에 잠복하는 외상후 증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흔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인식적 감정적 건강이 쇠약해지는 증상이다.

트라우마 증상의 주요 특징은 시간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흔히 생각하듯, 기억에서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침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 과거는 현재와 겹친다. 말하자면, 과거의 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이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극단적인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제주사회 및 그 공동체의식과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분열, 이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자신을 ‘생존자’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노인들의 건강에 끼치는 분열이 계속되고 있으며, 더 폭넓은 이해와 힐링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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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티박사는 뉴욕출신의 문화건강심리학자이며, 트라우마증상치료 경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제주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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