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엄창섭교수의 교육칼럼]

“나의 학창시절 이야기”

▲ 엄창섭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교수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초등학교 시절은 개구리와 매미, 미꾸라지 잡으러 다녔던 일, 기마전과 운동회, 소풍, 보물찾기, 그림 그리던 일, 시험관을 이용하여 아이스케이크 만들어 먹던 일, 옥수수빵, 기름걸레로 교실 바닥 청소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공부를 잘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성적표를 보면 학습 면에서는 객관적으로 그리 우수한 편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대개가 ‘양’이나 ‘가’였고 ‘우’나 ‘미’가 간혹 섞여 있다. ‘수’도 정말 가끔 있었는데 도덕이나 체육 같은 과목이었다.

본격적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의 일이다. 초등학교 때 늘 같이 장난치고 놀았던 친한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입학하고 바로 시험을 치렀는데, 아마 학력 평가 비슷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 때 내가 전교에서 약 50등 정도를 하였다. 한 학년이 15반 있었는데 한 반 친구가 60명 조금 넘었으니까 전체가 약 900명 정도, 그러니까 상위 10%내,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2-3등급쯤 되는 성적이었다고 할까? 내 친구는 전교에서 5등 정도를 했고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친구보다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인지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를 마음속에 목표로 설정하고 공부를 하게 되었고, 마지막 졸업시험에서 처음으로 그 친구보다 좋은 성적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과 축구도 했었고, 이소룡 흉내 내면서 패싸움 비슷한 것도 했었다. 좋아하는 친구 동생 사진을 뺏어 책에 붙여놓고 좋아하기도 했었고, 눈 오는 날이면 선생님 목 뒤에 눈을 집어넣고 도망 다니기도 했었다.

고등학교 때는 문과 이과를 놓고 고민하다 이웃집 형이 매번 고시에 낙방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과를 선택했다. 방과 후에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때 도서관에 있던 동서양의 고전과 한국문학 대부분을 섭렵했다. 한동안 향가의 아름다움에 빠져 시인이 되겠다고 난리치던 것도 이 시절이다. 토요일에 집에 가다 청량리에서 춘천행 기차 집어타고 무작정 떠났다 돌아왔던 기억도 있다.

특이하게 나는 고등학교 때 내 방에 따로 컬러 텔레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방방이 설치하고 살 만큼 부자는 아니었는데, 일본에 회사 주재원으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귀국하면서 사 오신 것을 영어 공부하라고 방에 들여놓아 주신 것이다. 당시는 우리나라에서 컬러 방송을 하기 전이어서 모든 방송은 흑백이었다. 간혹 미군방송에서 복싱 경기를 컬러로 중계했는데 색이 분리되어 마치 3D 영상을 맨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밤을 새워 미군방송에서 하는 공포영화를 즐겼다. 물론, 그때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이야 워낙 듣기 훈련이 잘 되어 고등학생의 영어실력이 원어민 수준이니 할 말이 없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영어를 말할 기회도 들을 기회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처음 제대로 알아들었던 것은 대학교 입학하고 난 후였는데 그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써놓고 보니 별다른 학창생활이 아닌 것 같다. 이런 신변잡기를 왜 끼적거리고 있는가 하고 물어볼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름대로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원칙들이 이 시기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나는 늘 내 나이에 맞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따라 행동했다. 물론 사고를 쳐서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진 않았다. 어릴 때는 산과 들로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고, 중학교 때는 여자 친구를 갖고 싶어 했고, 선생님에게 장난치는 그런 개구쟁이 시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때에는 책을 읽으면서 문학 소년의 흉내도 냈고 깊이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내 나이에 걸맞은 호기심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유연하게 즐기고 싶다.

둘째는 나 나름대로의 목표를 세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노력을 했다. 큰 욕심을 부린다기보다 매 순간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면서 보냈다. 공부해야 할 때는 공부했고, 놀아야 할 때는 놀았다. 그런 시간이 누적이 되면서 점차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채워간 것으로 생각한다. 시험 때라고 더 공부하지 않았고, 평상시라고 더 놀지 않았다. 즐기면서 한 것이니 결과가 잘못되어도 그리 슬퍼하거나 실망한 적이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지 않은가. 나는 지금도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최선을 다하고 싶다.

셋째는 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좋은 부모님과 선생님이다. 이게 나에게 가장 큰 복이었다고 생각한다. 조건 없는 이해와 지지랄까? 나의 성장 단계의 중요한 시점마다 말없이 배경이 되어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지금도 어디선가 조용히 나의 배경이 되어주시는 많은 스승이 계심을 믿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스승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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