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놀란 것은 구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만으로 두 살 때쯤이었을까. 사촌 누나 등에 업혀 뒤 울안으로 나갔다. 울타리에 옥수수들이 서 있던 기억으로 미루어 한여름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보는 순간, 무섭다며 누나에게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그 무렵, 누이를 따라 어함 마을의 백부 집을 간 적이 있었다. 누이의 아버지인 백부는 여름에 정어리를 잡고, 겨울에 명태를 잡던 해사海士로서, 파산 후 첩에 의지해 살고 있었다.


백부는 집에 이르른 나는 누이에게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며 울음을 터뜨렸다.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가 무서웠던 것이다.


구름과 바다.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된 인생은 이제 고희를 맞게 되었다.


야바위판 같은 세상에 용케도 살아왔다는 고마움이 왈칵 밀려든다.


어린 시절 나는 구경거리라면 사족을 못 쓰던 소년이었다. 장터 마당에 사커스가 들어오고, 트럼펫과 가스등 불빛과 말똥 냄세 유혹에 돈이 없으면 구멍 치기를 하던가 아니면 천막 주위를 서성거려 보기라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운규의 <아리랑>을구경한 것은 열 살 때쯤으로 기억한다. '한국 영화사' 에의하면 무성 영화 <아리랑>의 첫 상영은 1926년 9월 이었이니까 개봉 후 6년 만에 구경한 셈이 된다.


우리나라의 첫 발성영화인 <춘향>을구경한 것은 이만저만한 감동이 아니었다. 이 무렵에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에 우승하고 온 겨례에 감격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이 무렵, 비행운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늦가을이었던가, 쾌청한 날씨의 정오께였다. 야하!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하늘을 지켜보고 있었다. 꼬리에 길게 늘어뜨린 비행운이 신기했던 것이다. 하늘의 요새라고 말로만 들어오던 B29가 한반도 북쪽 하늘에 타나났었다.


단 한 대의 적기인데도 이쪽은 속수무책이었다. 대공포화는 커녕, 요격하러 올라가는 전투기 한 대도 볼수 없었다. 유람이라도 하는 듯 B29는 유유히 남쪽 하늘로 날아갔다.


최승희의 춤을구경한 것은 B29을 봤을 무렵일 것이다. 8백 석가량의 극장을 꽉 채우고도 자리가 없어 야단인데 용케도 관람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멋진 춤도 있을까. '승무','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등의 우리 춤이 주 레퍼토리였는데, 그 명랑, 활달, 우아, 익살맞음, 쓸쓸함이 교차되는 현란한 무대를 향해 연속 박수가 터져 나오는 열광의 한 마당이었다.


오래 되지 않은 놀라움에 대한 또 한 가지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36년 이었던가, 처음으로 한라산에 올랐을 때다.


성팍안 코스였다. 신록의 5월. 뻐꾹새, 제주휘파람새, 백화나무, 만개한 고산 진달래. 아마의 땀을 훔치며 정상에 올랐다. 그 순간 '아아 ! 백롬담' 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애절하다고 할까? 처절하다고 할까? 그때 휩싸였던 감정은 지금도 뭐라고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토록 애송했던 정지용의 '백록담'이라는 시구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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