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트 ‘퍼시픽 림’(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에 드리워진 일본의 영향력은 거대하다. 샘이 나고 또 부럽다. 한류에 뒤처지는 듯했던 일본 대중문화가 세계영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다시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퍼시픽 림’에 앞서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있었다. 할리우드의 천재 스티븐 스필버그가 기획·제작하고, 흥행의 귀재 마이클 베이가 감독한 이 외계 로봇 스토리의 캐릭터 원형은 일본에 있다. ‘퍼시픽 림’은 노골적으로 일본 괴수영화와 로봇애니메이션, 나아가 일본문화에 대한 ‘오마주’를 드러낸다. ‘건담’, ‘에반게리온’ 등의 실사판을 추구했다고 여기면 얼추 맞을 정도다. (‘퍼시픽 림’의 제작사인 레전더리픽처스는 내년에 ‘고질라’ 시리즈의 리부트 영화를 내놓을 계획이기도 하다)

타이틀이 뜨기 전 10여분의 도입부부터 그렇다. ‘퍼시픽 림’은 ‘환태평양’이라는 뜻으로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일본, 홍콩(중국), 마닐라, 미국령 괌, 미국의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알래스카 등이 주요 배경이다. 한국도 ‘인류를 지키자’ 등의 한글로 된 팻말을 들고 데모를 하는 장면으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기는 한다. 근미래 일본 태평양 연안 심해에 생긴 균열이 외계로 통하는 포털(문) 역할을 하며 엄청난 크기의 외계괴물 ‘카이주’가 나타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카이주는 일본어로 ‘괴수’라는 뜻이다.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 카이주의 난동은 일본 오리지널 괴물영화 ‘고질라’를 딱 연상시킨다.

인간들은 이에 맞서기 위해 지구연합군을 결성, 카이주의 크기와 맞먹는 25층 빌딩 높이의 초대형 로봇 예거(독일어 ‘사냥꾼’)를 만들어 대응한다. 예거는 뇌파를 통해 파일럿의 동작을 인식하는 신개념 조종시스템 ‘드리프트’로 작동되는데, 이는 ‘에반게리온’이 파일럿의 신경이 직접적으로 동작회로와 연결돼 싱크로율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이라는 콘셉트와 엇비슷하다. ‘퍼시픽 림’에서는 거대한 예거의 크기와 정교함 때문에 파일럿의 뇌에 과부하가 걸릴 수 있어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조종해야하므로 정신적 융합을 위해 부자, 형제, 세쌍둥이들로 각각 팀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설정을 보탰다.

여기서 주요 인물 중 하나로 아예 일본인인 마코(기쿠치 린코)가 등장하게 된다. 주인공 롤리(찰리 헌냄)가 파트너 파일럿인 형을 전투 중 잃게 되면서 새로운 파트너로 맞이하는 여성이다. 우산을 쓴 채 얼굴을 가리고 첫 등장, 앞머리를 내린 검은 단발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마코 캐릭터는 오리엔탈리즘의 극치를 보여준다. 마코를 비롯해 모든 캐릭터가 일본 만화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하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워너브라더스가 배급한 2억 달러(약 2271억원)나 들인 대작치고는 출연배우들이 무명에 가깝다. 그 때문에 일부 사실감을 높일 수는 있었으나, 캐릭터들의 면면과 과장된 연기는 일본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톡톡히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목소리를 내리까는 롤리, 티격태격하는 괴짜 박사들인 뉴턴(찰리 데이)과 고틀립(번 고먼), 동그란 선글라스와 철제신발 등 기괴한 차림새의 암시장 사업가 한니발 차우(론 펄먼)의 코믹함 등은 마치 일본 만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예거 레지스탕스의 대장이 된 스탁커 펜테코스트(이드리스 엘바)의 절도 있는 행동, 목례를 하는 예절,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자기희생, 가부장적 책임감 등은 일본의 무사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스승’이라는 뜻의 ‘센세’라는 일본어도 나온다.

서사는 몹시 빈약하다. 인물들의 트라우마와 로맨틱한 감정, 관계설정, 결말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형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늘어진다. 다만, 비주얼은 매우 볼만하다. 눈앞까지 밀려 들어오는 3D 입체 액션 앞에서는 입이 떡 벌어진다. 푸른 전기장을 내뿜는 괴수와 메가톤급 로봇의 생생한 움직임은 CG와 3D기술의 진보를 이뤘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 로봇과 괴수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보니 물리적으로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다. 바다를 배경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펼치는 액션신이 이러한 단조로움을 극복하긴 하나 그 양과 스펙터클이 기대를 충족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실제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검도와 쿵푸 대결로 메우고자 한 노력은 가상하다.

제작, 연출, 각본을 모두 맡은 멕시코 출신 길예르모 델 토로(49) 감독은 중세 고딕 스타일의 흡혈귀 영화 ‘크로노스’(1993)로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상을 타며 화려한 장편 데뷔전을 치렀고, 괴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판타지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로 고정팬을 확보한 감각파다. 아무래도 호화로운 액션신 연출은 기대하기 어려운 필모그래피이지만, 환상적 미감이 만들어낸 완성도 높은 영상미는 이 영화에서도 살아있다.

그가 다크 판타지에 강세를 보여왔고 에스파냐 화가 고야의 ‘클로서스’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홍콩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거나 두둥실 달이 떠오른 밤 같은 어두운 배경에서 벌어지는 액션신은 홍콩 누아르의 분위기가 강하다. 실제로 델 토로 감독은 시각효과팀에 19세기 일본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와 같은 우키요에 판화를 보여주며 바다 전투 장면에 참고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가 1960년대부터 일본 괴수 영화에 매혹됐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델 오토 감독이 ‘오덕후’(오타쿠의 한국식 단어. 오타쿠는 사회성이 결여된 채 일부 대중문화에만 집착하는 성향의 인간을 이르는 일본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 영화를 위해 동양, 특히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와 활용에 무척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카이주의 장기를 거래하는 암시장, 카이주의 뼛가루가 정력에 좋다며 돈벌이에 나선 홍콩 약국의 모습 같은 것도 상당히 중국적이다.

결정적으로 엔딩 크레디트에서 나가이 고(68), 도미노 유시요키(72) 등 일본인들에게 특별한 감사인사(special thanks)를 했다. 나가이 고는 만화가이자 다이내믹 프로덕션의 설립자로, 애니메이션 ‘마징가 Z’를 창안해 최초로 조종석에 파일럿이 앉아 조종하는 ‘슈퍼 로봇’ 장르를 만들었다. 도미노 유시요키는 TV만화 ‘철완 아톰’ 제작에 참여한 대표적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 명이다. ‘기동전사 건담’을 만들며 ‘슈퍼 로봇’ 장르를 실제 과학을 응용한 무기를 장착한 ‘리얼 로봇’ 장르로 전환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렇다보니 온라인에서는 일본 네티즌들의 열광이 벌써부터 대단하다. 일본의 대표적 캐릭터 수출품인 괴수와 거대 로봇이 맞붙었다는 것이다. 일본 유명 게임 제작자 고지마 히데오(50)는 자신의 트위터에 “내 인생에서 이런 영화를 보게될 줄 몰랐다”고 감탄하며 “‘퍼시픽 림’은 궁극의 오타쿠 영화로 일본인이라면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지 않느냐?”고 썼다.

막연한 오리엔탈리즘에 젖어있는 서구 관객들에게는 신비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세례를 줄기차게 받아온 국내 관객에게는 ‘왜색’ 영화 이상의 감흥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12세 관람가. 11일 개봉.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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