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북한민족화해협의회 초청으로 2002년 5월 10일부터 15일까지 5박 6일동안 북한을 방문했다.

지난 5년동안 제주도에서 생산한 감귤과 당근을 북한에 보내준 것에 회답하는 뜻으로 제주도민 253명을 초청했는데 나도 그 일행속에 끼었으니 남북통일 이전에는 가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북한을 다녀올 수 있어 행운을 만난 셈이다.

더구나 제주공항에서 평양까지 KAL기로 직행하였으니 민간인으로서는 남북 분단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월 10일 11시 제주공항을 이륙한 KAL기는 인천 상공에서 서해쪽으로 돌려 북상하다가 남포 상공에서 평양쪽으로 기수를 틀고 순안공항에 12시 30분에 착륙했으니 1시간 30분이 소요된 셈이다.

순안 공항은 북한의 유일한 국제공항인데도 제주공항의 1/5정도 규모밖에 안되어 우리의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과는 비교과 안될 정도로 빈약했다.

평양의 중심지 창광거리에 위치한 고려호텔에 도착하니 호텔종업원들이 현관에도 열하여 박수로 우리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고려호텔 45층짜리 쌍둥이 건물로 평양에서 제일 큰 호텔이고 외국 손님들이 많이 이용하는 탓인지 국제규모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설을 갖추었고 냉장고에는 각종 음료수를 채워 놓았으며 회장실에도 세면도구를 고루 갖추어 있어 세면도구 등을 챙기고 간 우리들 생각과는 달랐다.

호텔에 여장을 푼 우리들은 8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 만경대 소년궁전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 30명씩 탄 버스에는 남장 3명, 여자 1명 그리고 운전기사, 도합 5명의 안내요원들이 동승하여 우리의 언행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였다.

만경대 소년궁전은 겉으로 보기에도 웅장했지만 속에 들어가 보니 학교 교실만큼 칸칸이 마련된 각 공간에서 20여명의 어린이들이 무용, 각종 악기 다루기, 그림, 수예, 서예 등 전문적인 수업을 하고 있었고 태권도장, 수영장 등 넓은 공간동 있었으며 대규모 공연장도 있었다.

학생들 연습현장을 둘러본 우리가 공연장으로 입장하자 미리 들어와 있던 북한주민들이 우렁찬 박수로 우리를 환영했는데 아마도 동원된 인원인 것 같았다.

북한 어린이들의 노래와 무용 등 공연장면을 보면서 천진난만한 어린이 모습이 아니라 애늙은이 같은 인상을 느끼게 하여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곳은 한꺼번에 5천명을 수용하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수용한다’고 자랑하기에 ‘평양시의 어린이가 5천명 이사 될터인데 희망하는 어린이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질문했더니 난색을 표하면서 다른 곳에도 하나 더 있다고 대답했다.

소년궁전에서 호텔로 돌아온 우리들은 북한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이 마련한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

북한민화협 부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제주도민의 평양방문을 동포애로 환영한다’고 축배를 제의했고 우리들은 북한측 안내원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5월 11일 아침은 호텔 식당에서 한식과 양식으로 마련된 뷔페로 조반을 먹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으로 향했다.

만경대 고향집에 도착해 보니 어린 학생에서 늙은 노인까지 남녀군중 수만명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남쪽에서 온 손님이라 해서 특별히 차에 탄 채로 문앞까지 들어가, 기다리는 군중보다 우선적으로 구경하게 해 주었다.

김일성 생가 역시 조그마한 우리의 농촌 초가였고 집안에는 옛날 쓰던 가재도구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벽에는 고조할아버지부터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었다.

호적과 족보는 봉건제도의 유물이라 해서 폐지해 버린 북한이 김일설만은 조상의 뿌리를 나열하고 있어 어색해 보였다.

고향집 관람을 마친 우리는 버스로 30여분 달려 평양시 외곽에 있는 동명왕릉에 도착했다.

고구려 시조인 도명왕릉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이묘해 왔다는데 주변에는 신하들 무덤 5기가 더 있었다.

왕릉은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이 유물을 도굴해 가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왕릉옆에 있는 절<정능사>에는 스님도 불자도 없는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위생실(화장실)을 찾아 소나무 숲속에가 보니 화장실 가까운 곳에 많은 학생들이 모여 운동회를 하고 있었다. 감시원이 없는 틈에 학생들 있는 곳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소풍와서 놀고 있다는 학생에게 몇 학년이냐고 물은즉 고등중학교 6학년이라고 했다.

북한은 인민학교(초등학교) 4년, 고등중학교6년의 학제이기에 내년에 졸업하면 대학갈거냐고 물어보니 군에 입대한다고 말했다.

군에 입대하면 몇 년 복무하느냐고 물었더니 10년 복무하나다기에 남쪽에서는 2년 반 복무하는데 10년이나 군에 복무해야만 하느냐고 말했더니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과 헤어지면서 ‘우리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고 했더니, 선생인 듯한 분이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세요’ 하고 말했고 그들은 손을 흔들며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인사했다.

점심에는 단고기(보신탕) 집으로 안내되었다. 단고기집은 한꺼번에 수백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우리의 보신탕집 음식과 달리 각자에게 갈비, 가죽, 토막살, 내장, 신, 탕순서로 음식을 내놓아 깔끔했다.

점심후에 안내된 곳은 주체사상탑이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 높은 굴뚝으로 착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주체사상탑이었다.

대동강변에 어마어마하게 높이 세운 주체사상탑은 무엇을 과시하려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에 올라가 보니 평양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어서 북한이 자랑하는 지하철을 시승했다.

지하100m, 에스컬레이터 180m급 경사여서 현기증을 느꼈다. 가는 곳마다 벽면에는 김일성 그림이 그려져 있고 붉은 색으로 쓴 구호가 쓰여져 있었지만 지하철 역 벽면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구간을 북한주민 없이 우리끼리만 시승하고 내려 단체사진을 찍는 동안 안내원의 눈을 피해 지하철에서 내린 북한주민사이에 끼어 김일성대학 학생이라는 청년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데 어느새 안내원이 쫓아와 대화를 중단시켜 버렸다.

저녁때 고려호텔 로비에서 서양신부님 두 분이 보이길래 나도 카톨릭 신자이고 내아들도 신부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매우 반가와 했다.

한 분은 이태리 출신이고 또 한 분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로마에서 복무하는데 평양에 볼일이 있어 왔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선교활동이 가능하다고 보느냐고 물었더니 당분간 어렵겠지만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12일(주일) 10시에 평양의 장춘성당에서 미사 집전화고 저녁에는 원산으로 간다고 말하면서 5일동안 북한에 체류한다고 말했다.

5월 12일은 백두산 동정을 하게 되었다. 북한 고려항공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1시간만에 백두산 근처 삼지연 공항에 도착했다.

삼지연 공항에 대기하고 있는 미니버스로 백두산 천지를 향했는데 우리의 동정을 위해 전날 불도저로 쌓인 눈을 치워 길을 터 놓았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천지 4km를 앞두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로 인해 쌓인 눈이 길 위로 무너져 내겨 길이 막히는 바람에 천지로 갈 수 없이 안타깝기한이 없었다.

중국쪽으로 천지를 구경한 바 있는 나는 심상했지만, 처음 백두산에 온 사람들은 매우 아쉬운 모양이었다.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하는 도중 백두 밀령 고향집(김정일 생가)으로 안내되었다.

말하자면 김일성이 독립투쟁하던 60년 전 이 곳 깊숙한 산속에서 김정일을 낳았다고 해서 김정일 생가를 복원하여 북한 학생들을 1년에 한 번 이상 극기훈련시키며 구경 시키고 있었다.

높은 바위에는<정일봉>이라는 빨간 글이 조각되어 있었고 흐르는 맑은 물은 마시면 10년 젊어진다고 자랑했다.

이어 삼자연 대기념비-김일성 기념관-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는 김일성의 30대 모습 군복차림의 동상아 하늘높이 세워져 있었고 주변 양쪽에는 독립운동 당시의 부하들 동상 수십개가 무리지어 세워져 있었다.

삼지연은 조그마한 호수였고 이 곳을 중심으로 김일성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 같았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우리를 맞으며 설명하는 여자 안내원이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그들을 안내원이라 않고 강사라고 호칭했다.

김정일 생가와 삼지연에서 설명하는 여자 강사(안내원)들은 한복차림이 아니라 군복차림에 별표를 붙인 군모를 쓰고 있어 여군으로 알았는데 군인이 아니라 독립운동 당시의 여군을 상징하는 뜻에서 군복차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양 순안공항에 돌아오니 날이 어두워졌고 평양시내로 들어오면서 깜짝 놀란 것은 가로등이 없는 깜깜한 거리였던 것이다.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구호가 있는 곳에만 조명등을 비춰주고 가로등은 고려호텔 근처뿐, 다른 거리에는 가로등 자체가 세워져 있지 않았다.

아마도 전기사정이 허락지 않은 탓인지 주민들이 사는 아파트에도 형광등이 아니고 촉수가 낮은 전구를 사용했는지 어두침침했다.

5월 13일에는 단군왕릉 관광으로 시작했다. 단군왕릉은 94년에 완공했다는데 노약자나 지체장애인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계단으로 높이 쌓아져 있었다.

왕릉 가까운 계단 양쪽에는 네명씩 8명의 신하 석상이 세워져 있었고, 아들 3명의 석상도 세워져 있었다.

왕릉 네 모퉁이에는 커다란 호랑이 석상도 세워 놓았다. 왕릉 무덤속에 들어갔더니 관뚜껑을 열어 보려면 100달러를 내야 한다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북한이 단군왕릉을 복원하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릉을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이 우리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과시인 것 같기도 했다.

모란봉에 올라 을밀대에 서니 김구(金九)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방문에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것을 본 일이 생각났다.

모란봉공원은 평양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곳이라고 자랑하는 것에 걸맞는 것 같았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의 진수를 맛보았다. 대동강을 끼고 있는 옥류관은 한꺼번에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는데 과연 평양시민이 자유럽게 찾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김일성 70세 생일기념으로 세웠다는 개선문 파리의 개선문보다도 크게 세워져 있었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어렵고 국민들이 굶는다는데도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하는 것에는 엄청난 돈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김정일 학습관이란 곳으로 안내되었으나 학습관 내부는 보여주지 않고 그곳에서 만들어낸 그림, 수예, 도자기, 서예등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안내하여 우리들이 전시품을 사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김겅일 학습관은 전문 연구자들이 각 분야에 걸쳐 연구하는 곳인 듯했다.

평양 교예단(서커스단)의 공연은 과연 국제적으로 인정할 만하에 훌륭했다.

이곳에서 일본 조총련 학교에서 모국방문차 평양에 온 학생들을 만났는데 인솔교사 두분은 모두 제주도 출신이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 그들과 같은 동네 출신이 어렷 있어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천여명을 수용하는 교예단 극장에서 화장실을 찾아가 보니 남자 소변기가 단 하나뿐이어서 오랫동안 줄지어 기다려야만 했으니 규모에 걸맞지 않은 시설이었다.

5월 14일은 묘향산으로 향했다. 평양에서 묘향산 보현사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소요되었는데 왕복 4차선 고속도로를 달리며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세어 보았더니 겨우 9대에 불과했다.

보현사 입구에 있는 김일성 국제교류 전시관은 푸른 기와의 한옥이었는데 이곳에는 김일성이 각국에서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 카메라와 손가방, 모자 등은 입구에 보관하고 신발에는 덧씌우개를 신고 들어 가도록 했다.

겉보기와 달리 안에 들어가 보니 산속으로 파고 들어가 전시장을 마련한 듯 대단히 큰 규모였고 종합전시장 정면에는 김일성 좌상(동상)이 있었다.

지난 50년 동안 북한을 통치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받은 선물이기에 가치있는 물건들이었고 전시된 것을 하나하나 구경하려면 1년 반이 걸린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김일성 밀랍이 세워져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마치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였고 뒷 배경의 대동강 물은 흐르는 듯 출렁이는 배경효과를 담고 있었다.

김일성 전시관 바로 옆에는 김정일 국제교류 전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김일성 전시관 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비슷사게 꾸며 놓았다.

이곳에는 특별히 남한(남조선)관을 별도로 마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보낸 선물을 비롯하여 현대 정주영 회장이 보낸 방탄승용차와 각 기업체 대표들이 보낸 전자제품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물전시는 1인 독재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되고 북한주민들에게는 ‘남쪽의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김일성 부자를 존경하고 북쪽체제를 찬양하는 뜻에서 보내온 것’ 이라고 설명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내 마음이 쩝쩝해졌다.

보현사에 들려 보니 석가모니 탄신일이 가까워졌지만 아무런 장시도 하고 있지 않았고 오르지 스님 한 분이 법당에 서서 우리들에게 인사만 할 정도였다.

보현사도 6.25전쟁 때 일부 파손된 것을 복원했다는 설명이었고 팔만대장경 원본(책)을 잘 보존 하고 있어 남한의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과 함께 우리나라의 보물로써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묘향산 향산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정원에 나와 아름다운 묘향산을 쳐다 보면서 등산을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 했다.

묘향산으로 안내한다기에 등산할 준비를 갖추고 갔는데 김일성 국제교류 전시관을 보여주기 위한 묘향산행임을 알고서는 씁쓸해졌다.

저녁때는 고려호텔 연회장에서 우리쪽이 마련한 만찬이 있었다. 그동안 같이 다니며 친숙해진 북쪽 인사들과 내일이면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기 때문에 여러번 슬잔이 오가는 가운데 취기가 올라왔다.

5월 15일은 평양을 떠남에 앞서 남포갑문을 구경했다. 평양에서 남포까지는 버스로 40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고속도로는 왕복 8차선 정도였고 유사시 군용비행장 역할을 하게된 것 같았다. 남포갑문은 대동강을 막아놓은 것으로 농업용수 공급뿐 아니라 남포와 황해남도의 거리를 단축시켜 놓았고 5만톤 이상의 배가 접안할 수 있는 항구라고 자랑했지만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서해갑문의 환경오염 문제 같은 것은 없는지 의문스러웠다.

5박6일의 북한 방문을 끝내고 5월 15일 오후 3시 순안비행장에서 KAL기에 몸을 싣고 평양을 떠났다.

평양 순안공항을 이륙한 수 기내에서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을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다.

평양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건설현장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현대건설에서 짓다가 자금난으로 중단해 버린 체육관이 보기싫게 뼈대를 드러내 있었고 그옆에 105층 짜리 유경호텔 역시 골조공사만 한 채로 몇 년을 방치해 버려 시멘트가 부식해 떨어지고 있어 흉물로 남아 있을 뿐 건설공사 현장이라고는 눈을 비비고 찾아 보아도 볼 수가 없었으니 모든 발전이 멈춰버린 것이 분명했다.

남포로 가는 도중에 주민들이 펼치는 택지조성공사 현장을 보았는데 10여개의 빨간 깃발을 꽂아놓고 30여명이 삽질을 하는데 20여명은 북치고 나팔불며 흉을 돋우고 있었고 인민복 차림의 20여명은 근로감독을 하는지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 샵질하는 일꾼들이 흥이 나서 일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웠다.

고려호텔 주변뿐 아니라 곳곳에 포장마차가 차려져 있었는데 이는 한달동안 공연되는 『아리랑축제』에 온 외국손님들을 위해 임시로 마련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북쪽 안내원을 대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외출할 수 없는 그쪽 체제이기에 우리 일행들도 안내원을 대동하고 나가 대포술를 마시곤 했지만 주민들과의 접촉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한편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 한 북측인사들은 줄담배였는데 모두가 양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 그들이 외치는 주체사상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평양시내를 비롯한 북한 전역의 건물은 회색 일변도였다. 시멘트 벽에 페인트칠을 안했기 때문에 그랬다.

특히 농촌의 가옥들은 10평 정도로 줄지어 지어 놓았는데 스레이트 지붕은 이끼가 끼어 있는가 하면 비가 샐 정도로 손상이 간 것 같은데 개인 소유가 아니고 국유이기 때문에 수리를 못하는 거서 같았다.

북한에서는 회색 이외에 빨간색을 많이 불 수 있었다. 공공건물에 간판은 안보여도 구호만은 요란하게 빨간색으로 크게 써붙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옆에 있는 만수대 궁전(김일성 시신을 안치한 곳)의 울타리는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쌓아 놓았는데 지나친 감이 들었다.

나라살림이 어렵고 백성들 주택이 초라한데도 조각한 돌로 울타리를 쌓고 웅장한 개선문과 주체사상탑 등 엄청난 돈을 이런 곳에 쓰고 있으니 이해가 안갔다.

우리가 평양에 도착한 이후 사전에 스케줄을 알려주지 않고 매일 그날 일정만 알려주는 것도 이해가 안갔다.

오로지 그쪽에서 안내하는 대로 따라다녀야만 했으니 말이다. 가는 곳마다 여자강사(안내원)가 설명을 했는데,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시작했고 한 곳에서만도 수십번 그 소리를 듣다 보니 싫증이 날 정도였다.

우리차에 동승하고 다니는 안내원들도 은근히 통일이 안되는 원인은 남쪽 때문이라는 식이었으니 통일은 요원한 문제가 아닌가 느껴졌다.

북한주민과의 접촉을 차단 하고 우편, 통신, 신문, 방송이 통제된 폐쇄된 사회가 지구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잡념에 싸여 있는 동안 어느새 제주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임에는 틀림없는데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여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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