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미국을 위시로 한 다국적 합작영화 ‘블링 링’(감독 소피아 코폴라)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8월까지 1년여 간 5명의 10대와 2명의 20대가 할리우드 스타들의 집에 무단침입, 300만 달러(약 33억원)에 이르는 현금과 명품을 훔쳐 처분한 실제 절도사건을 담았다. 이들을 인터뷰한 낸시 조 세일즈가 유명잡지 ‘베니티 페어’에 쓴 ‘루부탱을 신은 도둑들’이라는 기사를 바탕으로 했다.

이들은 ‘사교계의 여왕’ 패리스 힐튼, 할리우드 스타 올랜도 블룸과 미란다 커 부부의 집, 린지 로한, 메건 폭스를 비롯해 국내에서는 좀 낯선 이름이지만 파티걸이자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오드리나 패트리지, 레이철 빌슨 등의 빈집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절도를 벌였다. 이들은 훔친 명품으로 치장하고 SNS에 ‘셀카’를 올려 자랑을 일삼았다. 들통 난 후에도 웬만한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기현상을 빚었다.

상당히 아기자기하고 감각적인 화면이다. 영화적 재미도 풍부하다. 명품과 대중스타에 열광하며 비행에 빠지는 요즘 아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도 그럴듯하다. 세계적 스타들이 모이는 할리우드와 베벌리힐스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더 더욱 허영심과 상대적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는 점도 잘 살펴보면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왜 이들이 이런 현상의 당사자가 됐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나 혹은 반성으로 인한 교훈의 여지 등은 별로 없다. 국내에서도 약물과 모방위험을 주 이유로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어떤 가치판단을 하기보다는 거리를 유지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듯하다. 세심하게 살피면 중산층 가정에서 물질적 부족함 없이 자란 이들 10대가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 환경적 원인이 곳곳에 드러나 있기는 하다. 그러나 화려하고 속도감 넘치는 카메라 워크에 가려버렸다.

주목할만한 것 중 하나는 사건을 주도한 레이철 정언 리가 순수 한국계라는 점이다. 발각당시 19세였던 레이철 리는 한국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탈북자 출신, 아버지는 한국출신 사업가다. 레이철 리를 극화한 극중 레베카 안 역을 맡은 배우도 쿼터 한국계다. 시카고에 거주하는 케이티 장(17)은 직접 오디션 테이프를 찍어 보내 이 역할을 따냈다.

‘블링 링’(‘할리우드 힐스 강도단’의 별명)의 리더답게 영화 초반 그의 비중은 크다. 별 죄책감도 없이 남의 차를 훔쳐 타고 잔도둑질을 하던 그녀는 문제아들이 모이는 대안학교 인디언힐스 고교로 전학 온 동성애 성향의 남학생 마크(이스라엘 부르사드, 실제 모델은 닉 프루고)를 꼬드겨 스타들이 파티나 촬영에 간 시간을 구글 검색으로 파악하게 한 다음 그들의 집으로 침입한다. 게이로 묘사되는 마크는 패션브랜드와 코디네이션에 관심이 많다. 이 명품도적단 주요멤버 중 청일점이다.

여기에 어머니로부터 홈스쿨링을 받고 있는 니키(에마 왓슨, 실제 모델은 알렉시스 네이어스)와 이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 샘(테이사 파미가, 실제 모델은 테스 테일러), 중간판매책 클로에(클레어 줄리엔, 실제모델은 커트니 에임스)와 그녀가 끌어들인 남아메리카 가톨릭계 롭(카를로스 미란다, 실제 모델은 로이 로페스 주니어), 장물처리를 맡은 클럽매니저 리키(게빈 로스데일, 실제모델은 자니 애자) 등이 연루됐다.


이들 패거리에게 다섯 번이나 털린 패리스 힐튼은 이 영화에 직접 출연까지 하고 자신의 실제 집을 촬영장소로 제공하기도 했다. 어지간한 명품 숍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쌓여있는 고급물건들을 쓸어 담아 와도 들통이 나지 않자 이들의 행각은 더욱 대범해진다. 주범인 레이철은 자신의 죄를 마크에게 뒤집어 씌우고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친아버지의 집으로 도피한다. 경찰 앞에서도 태연하게 연기하는 등 뻔뻔함의 극치를 드러낸다.

레이철은 잡힌 후에도 가장 궁금한 것이 자신의 우상인 린지 로한이 자신들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일 정도로 스타에 정신나간 모습을 보인다. 니키는 할리우드의 말썽꾼으로 감옥을 들락날락거리는 린지 로한과 우연히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 후 “어차피 오렌지 죄수복을 입기는 마찬가지인데 붙임머리를 하고 왔더라, 내가 린지 로한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CCTV가 뜨게 된 거다” 같은 언론 인터뷰를 하며 유명세를 탄다.

실제 레이철 정언 리는 가장 긴 4년형을 선고받고 2년 복역 후 올해 3월28일 가석방됐다. 전혀 미디어와 접촉하고 있지 않으며 그녀의 교도소 코치에 따르면 자신의 행동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수감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나 치료결과 정상적인 사고를 되찾고 어머니와 무척 가까워졌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어머니 역은 한국계 배우 재닛 송이 맡아 “엄마는 힘들게 일했고, 너한테 다해줬어”라며 한국식 어머니다운 익숙한 한국어로 잔소리를 해댄다.

영화 속에서 마크는 가장 양심적이면서도 소심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영화배급사 사장이라 스타들을 접하면서 멀쩡한 외모에도 그들만큼 잘생기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체포된 후 베니티 페어와 인터뷰에서 ‘병든 영웅심리’를 짚어내며 가장 이성적인 모습을 보인다. ‘왕따’였던 그에게 이 사건으로 800여명이 페이스북 친구요청을 해왔고 팬페이지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코카인 중독 등의 문제 등을 안고 있던 실제 모델 닉 프루고는 “우정을 잃고 싶지 않아 범행에 가담했다”고 고백했고 1년 복역 후 지난 4월15일 풀려났다. 쇄도하는 언론 인터뷰를 모두 거절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결말부로 갈수록 영화의 초점은 니키 역을 맡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타 에마 왓슨(23)에게 맞춰진다. 실제 모델 알렉시스 네이어스가 사건 직후 TV리얼리티쇼 ‘프리티 와일드’에 출연하는 등 일시적으로 범죄스타가 됐기 때문이다. LA 파티걸들의 생활을 다룬 ‘프리티 와일드’ 방영도중 열렸던 재판 장면도 이 프로그램에 담겼다. 180일의 실형선고와 3년의 보호관찰기간, 올랜도 블룸에게 60만 달러 배상을 선고받은 그녀는 30일 복역 후 석방되지만 2011년 12월 헤로인 소지혐의로 다시 체포돼 갱생시설에 수감됐다. 현재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캐나다인 사업가와 결혼해 딸을 낳은 상태다.

영화 속에서 니키는 배우가 되길 원해서 오디션을 보러다니고, 니키의 어머니(레슬리 만)는 딸들에게 할리우드 스타 앤절리나 졸리를 롤모델로 가르친다. 게다가 딸의 범죄가 발각된 뒤에도 베니티 페어에서 인터뷰를 하러왔다고 흥분하며 신비주의 자기계발서 ‘시크릿’의 교훈 운운하는 등 현실감을 상실한 허영기를 보여준다. 니키는 쏟아지는 카메라 스트로보 세례에 “고난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고 정신과 영혼이 거듭났으며, 세계적 업적을 이룰 리더가 되겠다”, “내 홈페이지를 통해 뒷얘기를 공개하겠다”는 과대망상을 펼쳐보인다. 현재도 자신의 블로그와 트위터 계정으로 활발히 자신의 생활을 생중계하며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고.


클로에 역의 실제모델인 커트니 에임스는 3년 간의 보호관찰과 60일 사회봉사 명령이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변호사에 따르면, 그녀는 더 이상 주목 받길 원하지 않으며 조용히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샘은 CCTV에 찍히지 않은 덕분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실제모델 테스 테일러는 알렉시스 네이어스와 함께 ‘프리티 와일드’에 출연했다.

그 외 로이 로페스 주니어는 캘리포니아를 떠나 텍사스에서 일자리를 잡아 살고 있다고 알려졌으며, 자니 애자는 3년형을 선고받고 1년 후 풀려났으나 다른 혐의로 재수감됐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작은 몸집으로 개구멍으로 침입하는 것으로 간단히 그려진 멕시코계 다이애나 타마요는 미국 매체 ‘데일리 비스트’의 인터뷰 요청에 “더 이상 언론에 아무 말도 않기로 했으며, 과거를 잊고 내 삶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 하나님을 찾고, 피트니스와 영양에 관련된 일을 시작했다”고만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알렸다.

‘짜릿한 일탈’로만 광고되기엔 그들에게 비춰진 스포트라이트는 짧았다. 긴 죄책감과 형벌, 살아내야할 인생의 무게가 남았을 뿐이다. 영화는 그 씁쓸하고 어두운 뒷얘기까지는 짚어내지 못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음에도 인간적인 모습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등장인물들 때문에 화려함으로 포장된 이야기만 공중에 둥둥 뜬 듯하다.

출연배우들중 유일한 톱스타인 에마 왓슨의 연기와 이미지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에마 왓슨의 출연이 이 영화에 화제성을 더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단단한 눈빛이 보여주는 또렷한 확신은 캐릭터 구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배우보다는 아역출신 벼락스타에 가까운 그녀는 세계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우뚝 선 인물로 이 배역에 적절치 못한 이미지와 연기를 보여준다. 전작들에서도 느껴진 바지만,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다면 스스로에 대한 옹골찬 자부심부터 먼저 던져 버려야할 터이다.

소피아 코폴라(42) 감독은 ‘대부’ 시리즈로 유명한 거장 프랜시스 코폴라(74)의 딸이다. 갓난아기 때부터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해왔으며 ‘처녀자살소동’(1999)으로 감독 데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마리 앙투아네트’(2006) 등을 연출했다.

<뉴시스>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