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남독녀와 결혼했다. 그러므로 처사촌 말고는 처남도 처제도 동서도 없고 우리 애들도 외삼촌이나 이모라는 말을 못해 보고 자랐다. 나는 결혼하자 장모님과 한 집에 살았고 우리 애들은 장모님이 도맡아 키워 주셨기에 부부가 안심하고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장모님은 정말로 팔자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다. 열 여덟살에 시집가서 딸 하나 낳고 얼마 없어 스무살에 홀로 된 청상과부이시다. 요즘 나이 스물이면 대학생에 불과하고 적어도 서른이 되어야 시집가게 마련인데, 그 시설 나이 스물에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되었으니 얼마나 앞날이 캄캄했는지 안 보아도 짐작이 간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어린 딸을 등에 업고 밭에 낙 농사짓는 심정, 하루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젊은 나이에 어떻게 홀로 사느냐고 팔자 고치라는 권고도 많았을 것이나 철부지 어린 딸을 떼어 놓고 개가하는 몰염치한 어머니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할때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집안 대소사 때 괸당들이 주고 받는 말, 시부모나 시아주버니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에 신경이 곤두서고 모두가 자신을 빗내어 하는 말로 오인하여 말다툼하여 서러움을 느낀 적도 여러

큰댁에서 아들 하나를 양자로 주자 자신이 배아파 낳은 아들 이상으로 애지중지 키웠는데 4.3 사건으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기구한 운명으로 남편이 세상 떠났을 때의 슬픔을 되풀이 하여 맛보았을 것이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큰댁에서는 손자 하나를 다시 양손으로 보내 주어 그나마 대를 이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딸이 시집가 아들. 딸 낳으니 외손자 키우는 재미로 모든 시름을 씻으며 사셨다. 십 수년간에 외손자들도 다 자라버리자 성당에 나가 기도하고 다른 할머니들과 어울려 다니는 재미로 모든 것을 잊고 지내셨다.


나이가 점점 높아지자 가끔 딴따라 약장수에게 현혹되어 이상한 약을 사다 먹어 복통을 일으켜 죽을 고생 할 때면 딸에게서 호되게 면박당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애처롭게도 느껴졌다.


딸과 사위가 호주, 뉴질랜드로 해외여행가면서 집거념을 부탁했는데 '걱정말라'고 장담했던 장모님이 하마터면 집을 불태워 버릴 뻔했다. 찌개 끓이느라고 가스렌지를 켜 놓고  TV를 보다가 깜빡 잊었는데,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자 이웃집마다 다니며


" 타는 냄사가 나는데 이상이 없으냐?"


며 확인하러 다니다 보니 그게 우리집 찌개 타는 냄새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가스가 떨어져 저절로 불이 꺼졌기에 화재를 모면할 수 있었다면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믿고 자랑하셨다. 장모님의 말을 들으며 '나이가 많이지자 생기는 건망증‥'을 실감하며 우려를 하곤 했다.


성당 이외의 다른 곳에 다니다가 넘어져 다칠까, 교통사고라도 당할까 염려되어 잔소리하는 딸의 눈을 피해 다니다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성당에서만 놀다 왐쪄"


하고 거짓말했다가 다음 날 신문에 전날 시민회관에서 있었던 경로잔치에 가서 춤추는 모습이 총천연색으로 대문짝만하게 보도되는 바람에 들통나서 딸의 면박을 들으때 계면쩍어 하던 장모님의 모습 ‥.


한번은 한라체육관에서 경로잔치가 있었던 때이다. 가시겠다고 말하면 모셔다 드렸을 것인데도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다. 무지 아파서 절뚝거리게 되었지만 아픈 것을 참고 경로당까지 걸어가서 한라체육관 가는 버스를 탔다. 행사장에 가긴 갔는데 도저히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중에 혼자 빠져 나온 것이 방향감각을 잃어 집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 헤메이고도 택시 탈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걸어서만집으로 돌아왔다. 그 여파로 발이 부어 한 달 이상 외출을 못하게 되자 딸로부터는


"제나 잘 콴이여! 정 다스러 나사 함부로 나다니지 않게 될 테이주!"


하는 구박을 받을 때 말도 못하고 누워 계시는 장모님은 참으로 처량해 보였다.


그렇게 성당으로, 경로잔치로 나다니기 좋아 하시던 장모님도 한 해 한 해 연로해 지시고 마침내 자리에 눕게 되자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셨다. 외손자 신부(神父)는 외할머니를 위해 집에 들러 기도와 영성체를 모시고 하고 팔, 다리를 주물러 드려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병세가 중하여 하루하루가 위태롭던 어느 날, 서울에 사는 큰 아들과 둘째아들이 아무런 연락없이 집에 내려왔다.


"무사 와시?"


놀라서 묻는 우리 부부의 질문에


"할머니 보고 가려고 ‥‥"


하는 대답이었다. 이심전심 '텔러파시'가 통했는지 당신이 키운 외손자, 손녀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바로 다음 날인 2002년 3월 17일 아침  7시에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3월 19일 서문성당에서 12명의 신부님들이 공동 집전한 장례미사는 '레지오'장으로 치러져 어느 고관대작의 장례 못지 않게 장엄했다. 외손자 신부의 강론과 외손녀의 '할머니를 떠나 보내면서' 라는 애절한 고별사는 참석자

65년 전 작고한 장인을 장모님 모시는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로 이장해 함께 모셨으니 지금쯤 장인, 장모가 65년만에 저승에서 다시 만나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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