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영화 ‘스파이’ 2013-12-25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한국영화 세계화의 거품이 꺼지고 있는 모양새다. 해외 영화인들이 한국을 찾을 때 의례히 칭송하는 한국영화는 한결같이 10여년 전 작품에 머물러있다. ‘올드보이’(2003)를 필두로 한 박찬욱(50)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2), ‘친절한 금자씨’(2005) 등 복수 3부작이나 봉준호(44)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5) 등을 언급하는데 그친다.

2012년까지는 칸, 베를린, 베니스 등 세계3대 국제영화제에 진출·수상한 한국영화 소식이 꾸준히 들려오더니 올해는 ‘이단아’ 김기덕(53) 감독의 ‘뫼비우스’(2013)가 베니스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받은 정도가 눈에 띄는 성과다. 문병곤(30) 감독이 ‘세이프’로 칸영화제에서 단편부문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으로 체면치레를 했다. 올 한 해 영화 관객수가 역대 최고인 2억명이 됐지만, 장편에서 고유성과 독창성으로 한국영화의 힘을 보여줄 만한 수작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국제영화제 참가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하지만 ‘신파적 감성팔이’라고 비판받는 대중영합적 영화나 철 지난 할리우드 영화의 기시감을 일으키는 아류들이 영화관을 채운다. 이러한 사태를 몰고 온 대기업의 전횡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2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전임들과 달리 이례적으로 ‘문화융성’을 언급했다. 경제부흥, 국민행복과 함께 국정 3대 키워드로 꼽은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연말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시대’를 문화융성 원년의 성과라며 자찬했지만, 과연 양적팽창과 함께 질적성장을 이뤘는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정작 영화팬들이 지목하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10년 전이다.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을 비롯,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한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등이 모두 2003년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현대 종합예술 중 가장 대중친화적 장르가 영상매체다. 한국인의 창작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잣대다. TV드라마에서는 ‘겨울연가’(2002)가 일으킨 한류는 주춤하고, 일본드라마를 리메이크하는 사례가 다시 늘고 있다. 창조경제의 각종 지표에서 중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가운데 하나인 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 업로드 수에서도 한국인이 올린 창작물 비율은 35개 조사대상국 중 인구를 감안하면 뒤에서 두 번째인 34위라는 조사도 있다.

문화예술의 바탕이 상상력과 창조력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안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는 문명을 만든 인간의 본성이다. 과연 현 한국사회와 영화계가 창작자들이 맘껏 뜻과 재능, ‘끼’를 펼칠 수 있는 필드가 돼줄 분위기와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 또 쇼핑몰·식당과 연계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뿌리내리며 그저 경제침체로 인해 상대적으로 싼 값에 즐길 수 있는 수동적 여흥문화로 영화가 자리잡은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2003년 정점을 이룬 한국영화는 2004년 ‘1000만 관객 블록버스터’라는 상업주의 캐치프레이즈가 등장하고 재벌 계열사들이 본격적으로 전방위 영화사업에 뛰어들면서 강자독식 생태계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CJ E&M과 롯데엔터테인먼트 등이 극장체인 운영에 이어 제작·투자·배급사업에 진출하면서 한국영화의 다양성 위기에 대한 경고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CJ는 영화 부가판권 시세를 주도하는 케이블채널까지 장악하고 있다.

2006년 현진시네마 이순열 대표는 최대 한국영화 배급사인 CJ의 횡포로 자사 영화 ‘홀리데이’가 개봉 사흘 만에 CJ CGV극장 체인에서 일제히 종영됐다며 “이러한 상황이면 앞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힘 있는 투자배급사의 눈치를 보며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올 것이다. 향후 이것이 한국영화계의 침체를 몰고 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메이저 투자배급사의 독과점이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예견은 이미 다른 중소 영화사들이 해온 바이기도 하다.

투자-배급-상영이 수직계열화돼 대기업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영화의 최종편집권이 제작사에서 투자배급사로 넘어갔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게다가 이들이 제작에까지 뛰어들며 할리우드 스타일의 상업영화 공식을 답습한 작품들이 성황이다.

CJ E&M이 제작한 ’광해, 왕이된 남자’(2012)는 미국 대통령을 소재로 한 ‘데이브’(1993)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봐야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왔고, 추창민 감독은 YTN에 출연해 “창의성이 풍부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다. 지난해 대종상을 싹쓸이하면서 다시 한 번 논란을 일으켰다.

흥행에서도 성공한 화제작들인 ‘스파이’(2013)는 ‘트루 라이즈’(1994), ‘타워’(2012)는 ‘타워링’(1974), ‘도둑들’(2012)은 ‘오션스 일레븐’(2001), ‘최종병기 활’(2011)은 ‘아포칼립토’(2007)와 비교되며 표절이냐, 차용이냐를 놓고 영화팬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늑대소년’(2012)은 ‘가위손’(1990), ‘7광구’(2011)는 ‘딥블루시’(1999)를 연상시킨다는 의견도 많았다.

【서울=뉴시스】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2013-12-25

이를 두고 한국영화의 퇴보로 봐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영화가 자본의 지배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장르이기는 하나, 이렇게 관객몰이와 돈벌이가 우선시 되는 분위기에서는 제2의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복합상영관의 폐해를 지적해온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2012)’의 베니스 황금사자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좌석점유율이 15% 미만인데도 1000만의 기록을 내기 위해서 영화가 안 내려가고 계속 있는 그게 바로 도둑들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영화 ‘도둑들’에게 직격탄을 쐈다. 영평상 시상식에서 최고작품상을 수상한 후에도 “백성의 억울함을 말하는 영화가 멀티플렉스 극장 독점을 통해서 영화인들을 억울하게 한 것은 많이 아쉽다”며 ‘광해, 왕의 된 남자’를 겨냥하기도 했다.

대기업이 제작, 투자한 영화의 상영 권한까지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수직통합체계 하에서는 관객의 영화 선택권도 현저하게 줄어든다. 할리우드식 장르영화를 볼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면서 영화팬들의 입맛이 획일화됐다.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80%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 상업영화의 영향력에서 더더욱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한다.

흥행실패의 리스크를 낮추고 안정적 이윤창출을 위해 일반적인 관객의 기호화 취향에 맞는 오락성 영화만을 반복, 재생산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장르영화’다. 미국에서 이러한 장르영화를 낳은 스튜디오 시스템은 ‘파라마운트 판례’로 1950년대 초반 막을 내렸다. 1948년 미국 대법원은 5개 메이저 스튜디오(MGM, 파라마운트, RKO, 워너브러더스, 20세기폭스)에 대해 영화 제작-배급-상영을 수직적으로 통합한 것은 독점금지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3개 마이너 스튜디오(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컬럼비아, 유니버설)에게도 영화관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덕분에 독립영화들과 유럽영화들이 미국시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을 수 있었고, 모든 영화가 개별영화의 경쟁력 만으로 승부해야하는 풍토가 마련됐다.

대형 배급사들이 중소·벤처 영화사로 가야할 정부출자금을 가로챈 셈 아니냐는 비난도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는 중소기업청이 한국벤처투자에 위탁운영 중인 영화부문 모태펀드 자금 중 70%가 CJ E&M·롯데엔터테인먼트·쇼박스미디어플렉스 등 3대 배급사에 투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 이강후 의원(새누리당)에 따르면, 모태펀드가 문화계정에 투자한 금액은 총 1조1033억원이고, 이 중 결국 영화산업에 투자된 6001억원 중 4150억원이 이들 3대 배급사로 흘러들어갔다. CJ E&M은 31.4%에 해당하는 1886억원을 투자받았다.

앞서 3월 중소기업청은 10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역대 박스오피스 4위에 오른 ‘광해, 왕이 된 남자’에 투자한 CJ창업투자를 비롯한 8개 창투사를 징계했다.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의 투자조합에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출자를 받거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이 지분을 갖고 있는 프로젝트에 투자할 수 없다는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60%에 이르면서 할리우드 영화로부터 자국영화를 지켜내겠다는 스크린쿼터 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한국 취향을 가미한 ‘할리우드 짝퉁’이나 대박 대작영화 만을 노리면서 자생력을 지속, 확보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영화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다국적영화의 영향과 자극은 필수불가결이다. ‘1000만’이라는 성적 위주 가치관이 예술계에서도 최우선시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양성과 상생은 영화계에서도 필요한 기치다. 한국영화 만의 독특한 문법으로 어렵사리 획득한 국제경쟁력,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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