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문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지난 1960년 4‧19 직후 제주대학 학생으로 구성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했던 이문교 이사장은 당시 도보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며 4‧3피해조사를 진행했다. 그해 6월 제주에 파견된 국회 양민학살진상조사반에 나가 증언했던 이문교 이사장은 군사정부에 의해 긴급 구속됐고, 기소유예로 석방되기까지 서대문형무소에 6개월이나 수감되어야만 했다.

이후 그는 언론인의 길을 택했지만 제주4‧3에 대한 관심만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문교 이사장은 1989년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방영된 제주4‧3 TV프로그램인 제주MBC의 ‘현대사의 큰 상처, 제주4‧3사건’을 기획 방송했다. 제주발전연구원장 재직 당시에도 ‘제주4‧3평화공원조성기본계획’ 연구단장을 맡아 기본계획을 수립했고, 제주4‧3연구소 이사로도 활동했다.

이처럼 제주4‧3은 이문교 이사장의 삶에 있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제주4‧3평화재단의 수장인 이문교 이사장을 만나 ‘4‧3희생자추념일’ 국가기념일 지정에 따른 소회와 더불어 4‧3평화재단의 현안사업과 향후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이문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 제주도민의 숙원인 ‘4‧3희생자추념일’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됐다. 소회는?

4・3사건이 비극적으로 종결된 이후 그 진상은 철저히 은폐되고 왜곡된 채 50여 년 동안 어둠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진실의 호도와 역사의 왜곡, 권력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부터 저항하고 투쟁하며 4・3의 진실 규명에 힘을 모았고, 그 결과 정치권과 정부에서도 4‧3특별법 제정,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등 4・3사건의 해결을 위한 법제적인 조치들을 취해 왔습니다. 그 정점에 다다른 것이 4‧3희생자추념일의 법정 기념일 지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법정 기념일 지정은 단순하게 4‧3희생자추념식의 의례 품격만을 높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두운 과거사 청산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진일보한 정부의 결단이고, 우리나라가 인권국가임을 세계에 과시하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공권력의 잘못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4‧3희생자에 대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한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이는 4‧3의 문제가 제주를 뛰어넘어 국가적 의제라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 4‧3의 세계화를 앞당기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즉, 역사적 갈등 해결의 새로운 모델로 제시되어 인권과 평화의 상징으로 4·3이 자리매김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있기까지 제주도민들은 바른 역사에 대한 가치 의식과 정의사회를 희구하는 불굴의 정신으로 매진해왔습니다. 4·3유가족과 제주도민의 역사적 진실에 대한 열망과 투쟁이 오늘의 4‧3을 만들어낸 주요 동력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3의 법정 기념일 지정은 우리나라가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단 한 사람의 인권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문명국가로의 진입을 상징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소중한 성과입니다. 이는 앞으로 유사한 비극의 재발 방지를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국가의 조치이기도 하며, 대한민국 과거사 청산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 4‧3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4‧3사건을 요약해주신다면?

4‧3은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어 사건이 비극적으로 종결되었지만 그 진실에 대한 논의는 막혀 있었습니다. 비민주적 정권이 지속되면서 제주도민이 직접 보고 겪었던 4‧3의 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4‧3유족과 도민의 가슴 속에 뚜렷이 각인된 진실과 응어리진 억울함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1960년대 처음 시작된 4‧3진상규명운동은 좌절되고, 1980년대 이후 민주화의 물결 속에 다시 한 번 활화산처럼 타올랐습니다. 2000년 1월 마침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제정‧공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4‧3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이하 4‧3위원회)’는 산하에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기획단을 구성하여 3년여에 걸친 조사를 통해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진상보고서)>를 확정했습니다.

우선 사건의 정의부터 살펴봐야 하는데 정부가 확정한 <진상보고서>에서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와 같이 단 몇 줄의 문장으로 4‧3사건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원인부터 매우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고, 발발 시점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즉 미군정기의 혼란스러운 시기라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봉기를 주도한 남로당제주도당의 주요 슬로건 중 하나가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5‧10선거 반대”였고, 무장대측 초기 지도부는 제주를 탈출해 ‘해주대회’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진압을 위해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그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나가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4‧3희생은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희생만이 아니라 무장대에 의해서도 군경과 민간인들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진상보고서는 4‧3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을 미뤄두었습니다. 즉, '사건‘이라는 단순하고 가치 중립적인 표현으로 대신하긴 했지만 성격 규명은 후세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입니다.

4‧3평화기념관의 첫 조형물이 ‘백비(白碑)’입니다. 이 백비도 아직 정명(正名)에 이르지 못한 4‧3의 이름을 후세대들이 많은 자료와 연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그 이름을 새겨놓아주길 바라는 상징으로 남긴 것입니다.

■ 4‧3사건의 인명 피해 규모는?

정부가 채택한 4‧3사건 진상보고서에는 4‧3으로 인한 희생자 수를 무려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로 10명 중에 1명꼴로 희생당한 것입니다. 이 중에는 10세 이하 어린이(5.4%‧756명)와 61세 이상 노인(6.4%‧894명)이 전체 희생자의 11.8%를 차지하고 있고, 여성의 희생(21.0%‧2,938명)이 컸다는 점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과도한 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희생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인원은 1만 4천 32명으로 4‧3평화공원 위령제단에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 4‧3희생자에 대한 조치는?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그 원혼을 달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위령제의 봉행이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민단체와 유족회 두 단체가 따로 추모제와 위령제라는 이름으로 위령행사를 치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의회의 중재로 1994년부터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4‧3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현재의 4‧3평화공원 부지에서 위령제가 봉행되고 있고, 올해부터 ‘4‧3희생자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되면서 안전행정부 주최로 ‘4‧3희생자추념식’이 치러졌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진상보고서 확정 직후인 지난 2003년 10월 31일 당시 노무현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의해 많은 제주도민의 희생되었음을 인정하고 도민에게 공식 사과했습니다. 이는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제도적 명예회복 조치라 할 수 있는 법정 기념일 지정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4‧3특별법 개정에 의한 희생자 및 유족의 범위 확대, 4‧3평화재단 설립 등 갈등과 반목의 세월을 뛰어 넘어 화해와 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고, 이제 4‧3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 4‧3평화재단이 수행하는 기본 임무는?

4‧3평화재단은 법령에 의해 △4‧3기념관 및 평화공원의 운영‧관리 △4‧3사건 추가 진상조사 △4‧3희생자 추모사업 및 유족복지사업 △4‧3문화‧학술사업 △국내외 평화교류사업 등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 그 외에 4‧3평화교육을 주요 사업으로 설정해 일상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4‧3기념관 및 평화공원의 운영‧관리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가 맡고 있는데, 앞으로는 4‧3관련 업무의 효율성 확대를 위해서도 4‧3재단이 이 역할을 맡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제주도와 정부의 협조와 지원은 필수적입니다.

▲이문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 이사장 취임 이후 새로 구상한 사업은?

제가 4‧3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4‧3화해보고서 발간, △4‧3평화상 제정, △4‧3노래 제작 △4‧3평화재단 중기발전계획수립’ 등을 재단의 주요 시책사업으로 추진, 수행하려 합니다. 화해보고서 발간이나 4‧3평화상 제정은 이제 제주의 평화정신을 키워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판단되었기에 시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4‧3으로 인해 피해자와 가해자는 물론, 육지와 섬, 마을과 마을, 이웃, 친족, 심지어는 형제끼리도 등을 돌릴 정도로 심각한 갈등과 반목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상규명 과정에 이른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갈등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를 슬기롭게 풀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제주도민은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4‧3의 깊은 상흔을 씻어내고자 노력했습니다.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의 화해 선언과 합동참배 등은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화합을 통해 밝은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제주인들의 평화정신과 슬기를 훌륭한 유산으로 전승될 수 있도록 화해보고서를 발간해 널리 보급하고자 합니다.

4‧3평화상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데 헌신하시는 분과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시는 훌륭한 분들을 발굴해 시상함으로써 4‧3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선양하는 미래 지향적 이정표로 삼을 것입니다. 바라건 데는 이 상이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에 상응하는 평화상이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남겨진 것은 평화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4‧3노래 제작은 4‧3사건이 일어난 지 66년이 되었지만 도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해원, 위무할 수 있는 상징적인 노래가 없습니다. 4‧3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사건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일도 한 방법인데 4‧3의 노래 제작은 이러한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중기발전계획 수립은 우리 재단이 4‧3의 가치와 교훈을 바탕으로 각종 기념사업을 펼치고, 평화의 가치를 선양할 중심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한 설계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즉, 미래가 있는 공익재단으로 성장 할 수 있는 토대를 닦을 것입니다.

이 계획에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향후 5년간의 설계를 담을 것입니다. 현재 조직과 사업 풍토에 대한 점검을 비롯하여 중장기적 관점에서의 조직재편 방향, 미래세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 등 4‧3평화재단의 미래 비전이 담길 것입니다.

■ 4‧3평화재단의 현안 사업은?

올해 처음으로 법정 기념일로 치러진 4‧3희생자추념식 봉행에 매진해왔습니다. 아시다시피 법정 기념일 지정이 3월 24일에야 확정되고, 정부 인사의 참여 범위도 하루 전에야 확정되는 등 혼란이 있었습니다만 몇 가지 상황별 시나리오를 갖고 준비했기 때문에 추념식은 순조롭게 마무리 됐다고 생각합니다.

법정 기념일 지정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전야제를 방송사에 위탁해 진행함으로써 도민 공감대 형성에 도움을 줬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무엇보다 첫 법정 기념일로 봉행된 4‧3희생자추념식은 KBS-TV를 통해 전국 중계 방송되었고, CBS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전국 방송되었습니다. 전야제 행사는 제주MBC에서 방송함으로써 올해 4‧3추념식은 전파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 전국 홍보에 큰 효과를 얻었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앞서 언급한 재단의 고유 목적사업과 새로운 시책사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업으로 통한의 세월을 살아오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4‧3장한어버이상’과 전국의 청소년에게 4‧3의 진실을 토대로 평화정신의 소중함을 널리 인식시키기 위해 실시하는 ‘전국 청소년4‧3문예공모’ 시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달 말에는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을 초청해 ‘노근리국제평화상에 대한 추진 과정과 효과 등에 대한 사례’를 청취하는 워크샵을 가지고 4‧3평화상 제정을 위한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4‧3추가진상조사 사업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난 2012년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단(조사단)을 꾸려 마을별 피해 실태를 중심으로 꾸준히 조사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희생자에 대한 기본 자료 조사와 더불어 조천읍 등 각 마을을 직접 조사하여 희생 실태를 꼼꼼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올해부터는 행방불명 피해 실태에 대한 조사를 병행하고 있으며, 종교계‧우익단체‧교육계 피해와 해외의 4‧3사료 조사에 대해서도 별도의 연구용역을 통해 그 실태를 파악하려 합니다.

■ 4‧3평화재단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4・3은 ‘어둠의 역사’였습니다. 이제 ‘빛의 역사’로 바뀌어야 합니다. 4・3평화재단은 4・3의 처참한 역사를 해원하고 화합하며 바르게 해결해 오고 있는 제주도민의 평화정신을 높이 선양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해결된 4・3의 조치들이 바라지창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도민들의 평화정신이 깃들어 있고, 그 지혜와 정신은 과거사 청산의 세계적인 모범사례로 자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4・3을 해결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가치를 부여하고 후예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한 구심체가 바로 4・3평화재단입니다. 때문에 앞서 열거한 희생자의 추모사업과 유족 복지 등 재단의 법정 기본사업을 충실히 해나가야 합니다.
더불어 4・3의 진실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평화의 가치를 선양할 각종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 될 것입니다.

4・3교육에도 충실 할 것입니다. 4・3평화공원에는 연간 25만여 명의 일반 관람객과 학생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방문자들을 위한 교육자료 준비와 4・3의 바른 역사를 위한 학교교육, 사회교육 프로그램의 구성과 자료 확충이 필요합니다. 4‧3아카이브를 구축하여 기록과 사료 관리를 과학화하여 이용 편이를 제공할 것입니다.

■ 과거 언론계에 계셨을 때와 현재 4‧3평화재단 이사장으로서 4‧3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저는 방송계에 오래 근무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방 언론에서도 1980년대 후반부터 4‧3에 대한 접근이 시도되어 진상규명에 적잖은 기여를 했습니다. 제주신문에서 1989년 4월부터 ‘4‧3의 증언’ 기획기사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제민일보가 ‘4‧3은 말한다’라는 기획기사를 장기간 연재 보도하여 4‧3진상규명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방송에서는 제주MBC가 적극적으로 4‧3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습니다. 제가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만 1989년 4월 2일 4‧3을 다룬 제주MBC-TV의 특집 프로그램 ‘현대사의 큰 상처-제주4‧3사건’은 한국 방송 사상 처음으로 방송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제주MBC는 해마다 4‧3기획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언론인으로서 나름대로 4‧3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사명감이 앞선 측면도 있었고, 또한 많지 않은 자료와 빈약한 연구 등으로 피상적으로 접근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간이 흘러 진상보고서도 확정되는 등 묻혀 졌던 진실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3평화재단 이사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4‧3을 피상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4‧3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관련 사업을 구상하고 전개할 때도 진실 추구와 도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추진하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 인간 이문교를 자평한다면?

냉철한 생각,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려는 보통 사람.
젊은 시절 멀리 있던 가족이 이제 가까이 있음을 행복이라고 느끼는 늦깍이.

■ 제주도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아시다시피 4‧3은 과거의 어둠에서 벗어나 양지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법정 기념일 지정으로 국가가 나서서 공식적인 희생자 추념식을 봉행했습니다. 비로소 빛의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이 상황을 새로운 화합과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는 숱한 아픔과 갈등과 원망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분법적 논쟁들이 오히려 진실을 호도하거나 아름다운 제주 사회를 분란의 마당으로 만드는 일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4・3을 과거처럼 갈등 프레임(frame)에 가두어 놓는다면 제주사회는 정체된 시간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선진 문명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도민들의 에너지와 역동성이 불필요하게 낭비되고 말 것입니다.

최상의 과학과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인간이 만든 모든 조형, 모든 시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연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로마 제국의 도시가 유적으로 남아있는 현상이나 제주 영주10경이 변하고 있음은 좋은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은 영원합니다. 제주의 평화정신을 존중하고 후예들에게 전승해야 합니다.

제주의 평화정신이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는 4‧3에 관한 한 작은 일을 크게 확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큰일을 작게 감추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4‧3위령제단은 진실만을 말하는 고해성사의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4‧3제단 앞에서는 모든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수사(修辭)가 난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평화정신이 거기에 있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들이 화해정신으로 슬기롭게 해결한 4‧3평화의 정신을 길이 선양하고 세계인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몫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저와 제주4‧3평화재단이 앞장서 이를 실천하겠습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이 평화의 여정에 저희들과 함께 해주시길 기대합니다. [뉴스제주 - 박길홍 기자]

▲이문교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
■ 이문교 이사장 주요 약력
□ 제주대학교 법학과,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 前 제주문화방송 보도국장‧편성국장‧총무국장‧이사
□ 前 제주발전연구원 원장
□ 前 제주관광대학 방송영상과 초빙교수
□ 前 대통령정책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
□ 前 한일해협권 연구기관협의회 회장
□ 前 국시도지사협의회 자문위원
□ 前 제주언론인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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