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과 원의 지배

삼별초(三別抄)의 난은 제주도의 역사상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주도가 큰 전란의 무대로 등장하고 고려문화를 일시에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백년에 걸친 원(元) 지배의 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1270년(元宗 11) 6월 원의 침략과 이에 굴욕적 강화를 맺은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 났던 삼별초의 난은 당초 강화도(江華島)에서 발발하지만 그 무대는 진도(珍島)를 거쳐 제주도로 옮겨지게 된다. 난을 일으킨 삼별초는 강화도에 묶어 두었던 1천척의 선박으로 곧 진도로 이동, 이곳에서 약 1년 남짓 항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항쟁하고 있는 동안에도 최후의 항쟁지가 제주도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고려관군은 1270년 9월 영암부사(靈岩府使) 김수(金須)와 장군 고여림(高汝林)에게 군사를 딸리게 하여 먼저 제주도로 파견, 삼별초의 상륙에 대비하여 제주도를 지키도록 하였다.

한편 삼별초도 이 정보를 듣고 이문경(李文京)을 대장으로 선발 군을 편성 제주도를 쟁취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진도에서 삼별초가 패전하기 이전부터 이미 전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삼별초 선봉부대를 이끈 이문경은 1270년 11월 명월포(明月浦)로 상륙작전을 감행, 관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으나 상륙에 성공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이어 동제원(東濟院) 전투에서도 승리하고 마침내 송담천(松淡川)전투에서 관군을 완전히 전멸시켰다. 이 때 김수(金須) 고여림(高汝林) 등 관군의 지휘관들도 전사했다. 이 때부터 제주도는 삼별초가 장악하게 되었다.

장군 김통정(金通精)이 이끄는 삼별초의 본 진이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그 이듬해인 1271년(文宗 12) 5월 진도전투에서 여원연합군에 패전한 뒤였다. 삼별초는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토성과 석 성 내외 성으로 된 항파두성(缸坡頭城)을 쌓아 본 거로 삼았으며, 애월(涯月)․명월(明月) 등 요소에는 성을 축조하고 해안 일대는 먼저 관군이 축조해 놓은 이른바 환해장성(環海長城)을 보축하여 연합군의 상륙에

수차에 걸친 협상에 실패한 여원군은 원의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을 원수(元帥)로 삼고 1만 여의 연합군을 편성 제주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1273년(원종 14) 4월 28일 새벽을 기해 좌익군을 비양도(飛揚島)에 투입시키고 중 군을 함덕포(咸德浦))로 상륙시켰다. 상륙 전을 비롯하여 파군봉전투, 항파두리전투 등 삼별초와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삼별초가 전멸하고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삼별초가 전멸한 뒤 원제국은 다루가치총관부를 두어 군사를 그대로 제주도에 주둔시키는 한편 1275년(忠烈王 1)에는 제주(濟州)를 탐라(耽羅)로 복호시키면서 원의 직속령으로 삼았다. 이 때부터 1373년 8월 최영(崔瑩)장군이 이끄는 2만5천 대군이 상륙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할 때까지 약 1백년에 걸치는 원의 지배를 받게된다.

그사이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제주도의 반환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으며 원도 이를 받아들여 1294년(충렬왕 20)과 1305년(충렬왕 31)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를 고려에 환속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제주도에서는 민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발생했다. 원은 그를 구실로 다시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14세기에 이르러 원 제국은 점차 세력이 기울다가 1368년에 마침내 새로 일어나 명(明)나라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원 세력이 동시에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명제(明帝)는 원의 목 호들이 기른 제주의 말을 공헌하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으며 목 호들은 이를 거부하여 여러 차례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①1356년(공민왕 5) 10월 가을적홀(加乙赤忽) 고탁(古托) 등의 난 ②1362년(공민왕 11) 8월 고독불화(古禿不花) 등의 난 ③1372년(공민왕 21) 3월 석가을비(石加乙碑) 등의 난 ④1374년(공민왕 23) 8월 합 적 석질리필
이들 목 호의 세력은 워낙 강하였으므로 관군의 힘으로 진압하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관군이 패전하여 철수하는 사례까지 일어났다.

여정은 마침내 최영(崔瑩)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이들 목 호를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최영은 2만5천여 대군을 이끌고 1374년 8월 28일 명월포(明月浦)에 상륙 격전 끝에 3천에 이른 목 호의 세력을 완전 섬멸시켰다. 이로써 제주도는 백년에 걸친 원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진주와 원의 장기간에 걸친 점거는 제주로서는 엄청난 수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는 얻은 것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낙후 고립됐던 제주도에 발달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고려의 중심문화였던 개경문화(開京文化)를 도입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주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문화의 한 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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