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편을 담은 찜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뉴스제주
회색 대문을 연다. 방앗간 한 모퉁이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제분기로 쌀가루를 내리고 있다. 왼쪽 벽면에 밀가루와 찹쌀가루, 옥토간척미 등 색색의 포대가 한 가득이다. 아들은 쌀이 잘 분쇄되도록 제분기 입구를 계속 휘젓고 있다. 그 밑으로 내려지는 쌀가루를 받아 어머니는 반죽을 한다. 반죽이 어느 정도 질퍽하고 부드럽게 개어질 때쯤, 며느리는 정갈하게 송편을 빚는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산과 들로 퍼져나간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위치한 김녕남문떡방앗간을 찾았다. 이곳은 김명자(71) 사장과 40대 아들 부부가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 71세 그녀의 방앗간 이야기

김씨가 방앗간 문을 연건 10년 전이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족이 함께 운영하던 양계장 문을 닫았다. 이후 김씨는 ‘가족들과 한 집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김씨는 아버지와 함께 산란계닭을 키우던 이곳에서 아들과 함께 떡을 만들기로 했다. 농협을 다니던 아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며느리와 함께 일손을 도왔다.

처음 방앗간 문을 열 때 주위 사람들은 혀끝을 찼다. 마을에 위치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바닷가 옆에 위치한 방앗간은 뒤쪽으로 논과 밭에 둘러싸여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누가 찾아오겠냐”며 어두운 전망을 내놨다. 그러나 김씨의 생각은 달랐다. 맛만 있으면 전화와 배달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봤다.

처음에는 영 서툴고 어색했다. ‘맛’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김씨는 어머니의 ‘떡’을 생각했다. 출중한 요리 실력을 자랑하던 어머니는 어릴 적 김씨에게 떡을 자주 만들어주곤 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곁눈으로 익힌 솜씨는 효력을 발휘했다. 점점 방앗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소위 ‘대박’은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맛집’이 됐다.

▲ 중학생들에게 떡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김명자(71)씨. ⓒ뉴스제주
# 10번째 추석맞이, 떡 한 조각에도 우주를 담아

김씨가 방앗간 주인으로 추석을 맞이한 지도 벌써 10년째다. 추석 차례상에 대해서도 이제 전문가가 됐다. 제주도만의 특별한 떡 문화가 무엇인지 묻자 김씨는 “우리 조상들은 떡 한 조각, 쌀 한 톨에도 우주를 담아냈다”며 달뜬 목소리로 설명했다.

“제주도는 제사를 지낼 때 떡을 진설하는데 침떡, 솔변, 절변, 지름떡(별떡)을 차례로 올려마씀. 침떡은 밭인 지구, 솔변은 달, 절변은 태양, 지름떡은 별을 상징햄수다. 가장 위에는 강정이나 요애를 올리고예… 떡 하나에도 우리 조상들은 우주와 만물을 담아냈수다.”

김씨는 지름떡을 꺼내와 제주 향토 떡이라며 맛보기를 권한다. 한입 베어보니 탱탱하면서 쫄깃하다. 이어 김씨는 ‘우리 집의 베스트셀러’라며 상외떡을 보여준다. 찜통에서 갓 꺼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퍼지는 상외떡은 한겨울에 먹는 찐빵과 닮은 모양이다.

“제주도 향토 떡으로 ‘상외떡’이 있수다. 밀가루에 막걸리를 넣고 반죽해 발표시킨 뒤 팥소를 넣고 둥글게 빚어 찐 떡이우다. 제주도는 쌀이 귀해 밀가루를 발효시켜 만든 상외떡을 제사상에도 올리기도 했수다. 또 음력 초 하룻날과 보름날 제사 때 이 떡을 대바구니에 담아 주는 풍속이 이서마씨”

# 맛있는 음식의 홍수… 떡은 명절에만 반짝

“요즘 사람들이 제사를 예전만큼 안 지내니까 당연히 떡 수요는 줄었수다. 요즘은 제사를 모아서 하고, 1년 치를 한 번에 치르기도 햄수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니까예. 가끔은 이대로 가다가 떡이 사라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어마씨. 그래도 추석이나 설날에는 떡 찾는 사람들이 반짝 늘엄수다. 물론 예전만 못하지만 대목은 대목마씨”

명절이 되면 떡 판매량은 급증한다. 김씨의 방앗간은 명절기간 평소보다 7배 가까운 떡이 팔린다. 그러나 10년 전만 못한 수치다. 10년 전에 비해 추석 판매량은 1/3 가량 줄었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많은 떡집들이 문을 닫았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며 집마다 식구들이 적어졌고, 사람들은 그만큼 떡을 조금씩 사갔다. 떡집을 찾기보다 인근 대형마트에 진열된 떡을 구매하는 경우가 오히려 흔해졌다.

또 예전에는 결혼식이나 백일, 돌잔치 등을 지낼 때 무조건 떡을 맞췄지만 요즘은 뷔페에서 잔치를 여는 경우가 많아졌다. 굳이 떡집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들 한승용(45)씨는 “요즘 너무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오니까 수요가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다”면서 ”그래도 앞으로 변함없이 가족들과 방앗간을 이어가고 싶다”며 소박하게 웃었다. 그는 앞으로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방앗간을 알릴 계획이다.

▲ 최근 전통 떡 만들기 체험을 위해 방앗간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뉴스제주
# ‘전통 떡’ 알리다

최근 전통 떡 만들기 체험을 위해 방앗간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얼마 전 다문화가정 이주민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추석을 맞아 함덕중학교 학생들이 4차례에 걸쳐 체험학습을 진행한다.

3일 오후 2시 함덕중학교 1학년 3반 학생들이 방앗간을 찾았다. 관광버스 문이 열리며 하늘색 하복 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내린다.

작업장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기웃거리며 꽃무늬 앞치마를 두른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킥킥 웃어대며 손수건으로 머리를 꽁꽁 감싼다. 이를 보는 주인장 김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환하게 핀어난다.

떡 체험 담당은 며느리 양지은(42)씨다.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양씨는 학생들이 방에 모이자 하던 일을 멈추고 송편 빚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반죽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한쪽 손으로 반죽을 떼어 완두콩을 넣고 손으로 쓱쓱 돌려 말아 가운데를 누르면 둥글고 납작한 제주도 송편이 완성된다. 한 친구는 반죽에서 완두콩이 터져 나오자 터진 송편을 들고 외친다. “와. 돌연변이다!”

전혜심(52) 선생님은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직접 아이들과 함께 송편을 만들어보니 좋은 추억이 되는 것 같아 기쁘다”며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만드는 것 같아 보여도 방앗간에 간다니 너무 좋아했다”고 말했다.

아들 한씨는 “떡을 알리는 것 같아 보람이 느껴진다. 전통문화를 체험한다는 의미에서 요즘 따라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앞으로 중학교 1학년인 아들에게도 떡 만들기를 가르쳐볼 생각”이라며 흐뭇해했다.

아이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방앗간. 이곳에서 어머니와 아들과 며느리는 다시 제분기에서 쌀가루를 내리고 있다. 찜통에서 뜨겁고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며 작업장 창문에 서리가 낀다. 김씨 가족은 며칠간 이곳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송편을 만들 예정이다. 추석을 앞둔 방앗간은 고요하고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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