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멍의 너른 품으로’ 내건 제주 전국체전, 소수 외면한 ‘다수만의 축제’
휠체어 경사로‧장애인석‧안전손잡이 등 배려시설 미비

▲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경사로 없이 계단만으로 이뤄진 제주종합경기장에서 관람객들이 제95회 전국체육대회를 지켜보고 있다. ⓒ뉴스제주

다리가 불편한 손모(44)씨는 큰 경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달뜬 마음으로 28일 제주종합경기장을 찾았다. 휠체어를 끌고 입구에 도착한 손씨는 경사로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결국 면적 1만9000㎡의 경기장 반 바퀴를 돌았다. 가까스로 일반 진입로를 찾아 2층에 올라간 손씨는 절망했다. 또다른 계단들이 벽처럼 손씨를 가로막은 까닭이었다.

전국체전의 씁쓸한 그늘, 장애인은 장외(場外)로…

제95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이 장애인을 외면한 ‘반쪽짜리’ 화합의 장으로 얼룩졌다.

28일 제주종합경기장은 휠체어 경사로, 장애인 관람석, 안전 손잡이 등 배려시설 미비로 경기장 곳곳에서 장애인과 유모차 이용객 등이 우왕좌왕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날 주경기장에서 일반인 관람객이 이용할 수 있는 출입구는 외문 9곳으로 이중 휠체어 경사로가 설치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외문은 모두 15~20칸의 가파른 계단을 거쳐야만 통과할 수 있다.

계단 없이 평평한 직문 4곳은 선수 및 관계자만 입장할 수 있어 휠체어 이용객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휠체어 이용객 손모(44)씨는 “입구마다 안내원들이 계속 저쪽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경기장 반 바퀴를 돌았다”며 “휠체어 시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없어서 깜짝 놀랐다”며 씁쓸함을 토로했다.

▲ 28일 제95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린 제주종합경기장은 선수 및 관계자만 입장할 수 있는 직문 4곳을 제외하고 일반인 출입구 27곳에 모두 휠체어 경사로가 설치되지 않아 장애인과 유모차 이용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뉴스제주

유일하게 휠체어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각 문과 별도로 운동시설을 위해 설치된 일반 진입로 2곳이다.

진입로는 각 문과 별도로 동측과 서측에 설치돼있지만, 이날은 VIP가 참석하는 본부석 인근 서측 진입로가 폐쇄되고 동측 외6문~외4문 사이의 진입로만 개방됐다.

즉 다른 방향에서 들어온 휠체어‧유모차 이용객들은 동측 진입로를 찾아 넓은 경기장을 한참 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일반 진입로를 이용해 출입구를 통과해도 내문 18곳이 모두 6칸짜리 계단으로 돼있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관객석으로 진입이 불가능하다.

2살짜리 아이와 함께 나들이 온 관람객 김모(32)씨는 “곳곳에 배치된 소방대원과 자원봉사자들이 개회식 구경하느라 바쁜 것 같다”며 “관람석에 올라가려 했지만 유모차 옮기는 것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그냥 1층 무대 뒤쪽에서 서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도 답답함을 토로했다.

왼쪽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이용하는 김모(68) 할아버지는 “계단이 너무 높고 손잡이도 없어 걸어 다니기가 너무 불편하다”며 “개회식이 시작하자마자 다리가 아파서 나간다”며 발길을 돌렸다.

▲ 유모차 이용객이 진입할 수 있는 경사로가 없어 2층 관람석에 올라가지 못하고 1층 무대 뒤쪽에 서성이고 있다. ⓒ뉴스제주

관람객 편의를 위해 곳곳에 배치된 소방대원과 경찰은 “경사로나 장애인 관람석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거나 “자원봉사자나 주최 측에 물어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자원봉사자는 “따로 장애인 관람석은 없는 걸로 안다”며 “휠체어 이용객은 맨 앞자리인 기자석에 앉으면 된다”는 다소 엉뚱한 답변을 내놨다.

실제로 이날 경기장에 장애인 관람석은 10석 마련됐다. 그러나 모두 대통령 등 VIP가 입장하는 본부석에 있어 미리 대상자가 지정됐다. 일반 관람객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제주도 전국체전기획단 관계자는 “직문을 제외하고 외문과 내문에 경사로가 있는 지 잘 모르겠다”며 “장애인 관람석은 본부석의 10곳을 제외하고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따로 없어 불편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한편 제주 전국체전에는 국비를 포함해 모두 998억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이중 800억원이 주요 경기장 10곳과 소규모 경기장 35곳 신축 및 개·보수에 사용됐다. 

‘어멍의 너른 품으로’를 주제로 화려하게 출발한 제95회 전국체전이 소수에게 눈 감은 ‘다수만의 축제’로 첫 발을 내딛으면서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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