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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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아내의 칠순을 기념하여 중남미 6개국 여행길에 올랐다.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우리는 미국 LA를 경유하여 멕시코, 쿠바,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를 18일 동안 한 바퀴 돌고 오는 코스였다.

멕시코, 쿠바를 거쳐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도착하자 이곳에 이민와서 살고 있는 괸당(친척)손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와 어려서부터 이웃에 함께 살아 매우 친숙한 사이였다.

족보상으로는 내가 할아버지뻘이었고, 나이는 나보다 서 너살 밑이었다. 하지만 꼬박꼬박 나에게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여 깍듯하게 대해 주는 사이였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4.3사건 등으로 어려운 고비에 고생하며 자라났고 월남한 피난민과 결혼하더니, 저 멀리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기반을 잡았다.

그 후 고향의 보모님과 오빠네 식구 모두를 불러들여 그곳에서 잘 살 수 있게 해 드렸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후 그 곳 땅에 ane히셨다.

아르헨티나에서 성공을 거둔 그녀는 오빠네 식구는 남겨두고, 디시 칠레로 터전을 옮겨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전해 들었다.

“집에서 떠나올 때 전화번호를 미리 적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면서 현지 한국인 가이드에게 이런 사정을 말했더니 “일단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요. 최대한 찾아보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남편 이름은 잊어 버렸고, 내 손녀되는 이는 『현천대』라 하는데, 부인의 이름이라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하고 운을 떼었다.

그러자 가이드는 “어? 우리 어머니 친구분이신 것 같은데요. 잠시 기다려보시지요. 엄마에게 물어보지요.” 하며 휴대폰으로 자기 모친에게 금방 확인하여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뜻밖에 내 연락을 받은 손녀는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내 숙소로 달려와 반가이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 그 동안 지내온 얘기를 실컷 나누고 싶었지만, 우리의 다음 일정 때문에 얼굴만 보고 헤어지려니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과 헤어진 뒤로 우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를 10여 일 동안 구경하고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밤 12시에 LA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 타 귀국길에 들어섰다.

이 비행기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출발하여 밤 12시에 리마를 경유하는 항로여서, 기내는 출발지에서 탑승한 손님들이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중에 탑승한 우리들은 배정받은 좌석을 찾아 조심조심 기내에서 이동을 했다.

우리 내외가 배정받은 좌석에 와 보니, 우리 좌석은 안쪽인데 바깥쪽에서는 이미 동양인 내외가 눈가리개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안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조심스럽레 툭툭 건드려 잠을 깨웠다. 눈가리개를 벗고 나를 쳐다본 그 부부는 “할아버지!”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서는게 아니가. 손녀네 내외가 LA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렇게도 우연히 같은 비행기, 그것도 같은 줄 좌석에 배정되어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더라도 400명이 넘는 승객 속에서 누가 탔는지 알 수 없을 터인데, 이렇게 나란히 좌석을 배정받게 되다니, 정말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하고 느껴졌다.

손녀 내외는 일 년에 네 차례 정도 LA에서 시장정보를 얻고 다음 날 한국의 남대문 시장을 살핀 후 중국의 상해로 가서 물건을 구매하고 칠레로 돌아간다고 했다.

페루에서 LA까지 장장 8시간 동안 우리는 칠레에서 못 나눈 지나온 세월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얘기꽃을 피웠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산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연락이 닿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못다한 회포를 풀 수 있도록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 섭리에 감사했다.

칠레에만 해도 우리 동포가 몇 만 명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겨우 이름만 대었을 뿐인데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내 손녀 되는 사람이 봉사활동 단체에 가입하여 사회봉사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딜 가서 살더라도 몰명지지 말고(미련하지 말고) 요망지게(똑똑하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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