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집행부는 직접 예산편성을 하지 않고 주민의견을 수렴한다고 할까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호의 '협치'가 자못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김용구 제주도 기획조정실장은 2일 '응급민생 추경예산 편성을 위한 입장' 기자회견을 통해 도민토론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예산편성은 집행부의 고유권한이고, 편성된 예산안을 심사하는 것은 의회의 고유권한이다. 그런데 집행부는 왜 직접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하지 않고 주민의견 수렴과 토론회를 통해 편성하겠다고 한 것일까.

한 해 도정 운영의 기본이 될 예산편성에 토론회를 통해 주민의견을 수렴한다면 '협치'의 모양새가 돋아나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2015년도 예산안은 토론회나 주민의견 없이 집행부에서 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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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꼼수?

지난해 도의회는 집행부의 예산편성을 앞두고 "원희룡 도지사가 '협치'를 내걸었으니 예산도 협치를 해야한다"며 집행부에 "예산편성을 위한 사전작업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도정은 "예산편성에 의회가 관여한다는 건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요구다. 예산은 협치 대상이 아니"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2015년도 예산안이 1636억 원이나 감액된 후 가결되자 제주도정은 난감해졌다. 유보금으로 묶인 예산을 집행하려면 다시 예산을 편성해 의회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삭감된 예산안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올릴 경우, 의회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져 의원들이 재차 부결시켜버릴 가능성이 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집행부는 도리어 의회에게 "추경을 어떻게 편성하면 좋겠느냐"식으로 되묻고 있다. 원 도정은 한사코 "의회가 삭감한 1636억 원 중 되살려야 한다고 판단되는 항목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예산은 협치 대상이 아니라더니 이제와서 '협치'하자는 꼴이다.
추경안 제출로 패를 먼저 보이기 싫어진 도정이 불리해졌다고 판단이 되자 의회에게 먼저 갖고 있는 패를 보여달라고 조르는 형국이다.

이에 제주도의회는 "예산편성은 집행부가 해야할 일인데 왜 도의회에 떠넘기려 하느냐"며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주도정은 추경 편성을 위한 토론회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 도의원들도 참석해 의견을 달라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그동안 제주도정이 의회에 알려달라던 것을 공개된 자리에서 밝혀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의회의 기존 입장을 고려한다면 도의원들이 이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왜 제주도정은 이러한 제안을 했을까. 패를 먼저 보여달라는 것이 먹히지 않자, 제주도민들이 참석하는 토론회에 의회를 끌어들여 의회의 속셈을 알아보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토론회를 구실로 추경편성이 늦어지는 것에 대한 책임을 돌리기 위한 꼼수로 비춰지는 이유다.

토론회를 열겠다는 김용구 기획조정실장의 발표에 이러한 지적들이 쏟아졌다. 기자회견 현장에서 기자들은 김 실장에게 "과도한 이벤트 성격으로 보인다"라거나 "예산책임을 도민에게 떠넘기는 요식행위가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여러 질문이 쏟아졌지만 김 실장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문제일 순 있다"라는 답변으로만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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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차피 집행부에서 편성해야 할 예산안... 토론회, 설문조사 실효성 있나

더구나 제주도정에서 실시하겠다는 설문조사는 너무 형식적인 수준에 그쳐 보인다. 단 2개 문항 뿐이다.

설문조사 항목은 제주도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컴퓨터 IP 하나당 한 곳에서만 할 수 있어 중복투표는 불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질문 하나는 <도의회에서 삭감된 예산을 다시 편성할 경우, 편성범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인데, 선택할 수 있는 답안지는 ▲삭감예산 전액편성 ▲응급 민생예산을 포함해 도에서 판단 형성 ▲응급민생예산만 선별해 편성 등 3개다.

'응급민생예산만 선별해 편성'을 선택하면 16개 항목 중 우선순위를 정해달라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다른 하나는 이번 추경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예산개혁을 위한 추진과제>에 관한 질문이다.

설문기한은 단 4일, 2월 2일부터 5일까지다. 과연 얼마나 많은 도민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지 의문이다. 혹은 투표에 5000여 명의 공무원들이 동원될 수도 있다. 짧은 기간 동안 전화가 아닌 인터넷 투표로만 이뤄지는 설문조사이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참여 비율은 공직자들에 비해 낮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고려하면 실효성에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번 추경과 관련된 질문은 단 1개 뿐이다. 이를 집행부에서 결정하지 못해 도민의 의견을 구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

# 도민 피해는 뒷전, 주도권 쥐기 위한 치킨게임만...

문제가 이렇게 커져버린 발단은 그간 새해 예산안 편성 일정 부분에 도의원들이 지역구 예산으로 재편해왔던 관행을 원희룡 지사가 단 1%도 용납하지 않으려는데 있다.

원 지사가 증액을 불허하니 도의원들은 증액 규모를 0원으로 하고 감액을 1636억 원이나 했던 것이다. 보복성으로 비춰지는 면이 분명 있기 때문에 원 지사는 책임을 의회에 돌리려고 각종 매스컴을 이용해 의회를 자극했다.

원희룡 지사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도정에서 편성한 예산 그대로 100% 집행되기를 고집하고 있다.

관행을 하루 아침 단칼에 없애겠다는 원 지사의 '원칙'은 고집에 가깝다. 의회와의 예산다툼에서 1%의 손실도 입지 않고 승리하겠다는 발상은 누가봐도 무리한 태도다. 이 정도면 황소고집이다.

이번 추경을 위한 토론회는 말이 좋아 '토론회'일 뿐, 의회와의 치킨게임에서 우위에 서고자 하는 술수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입 밖으로는 민생예산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말 뿐이다. 해군기지 군 관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는 했지만 결국 행정대집행은 이뤄졌다.

물론 모든 공약이나 약속이 지켜질 순 없다. 허나 명백히 할 수 있어 보이는 것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도민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우려의 말은 오히려 진정성이 떨어져 보여 역효과만 불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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