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를 만난 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몽골과 지난한 전쟁이 거의 마무리 되면서 조정은 개경으로 환도를 결정했다. 그때까지 도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간 적이 없었다.
“나이가 찼으니 혼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남들보다 한참 늦었느니라.”
약관이 지난 이후부터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만 마주치면 혼례 얘기를 꺼냈다. 집안에서 정해둔 처자가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서두르라는 것이었다. 그 처자가 중서문하성 급사중 어른의 셋째 딸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풍문에 따르면 보통 여느 집 셋째 딸은 얼굴도 보지 않는다고 했으나, 애통하게도 난 그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굳이 보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고 국자감에 다녀오다가 우연히 발길이 저절로 어찌어찌 급사중 어른의 집까지 닿았다. 담장 너머에 핀 꽃이 어찌나 곱던지 나도 모르게 슬쩍 곁눈질하다가 그 셋째 딸과 아주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경국지색으로 나라를 기울어뜨렸다면, 내 눈으로 본 처자는 그 모습 자체가 나라를 지켜낼 유비무환이었다. 셋째 딸이 예쁘다는 풍문은 도대체 누가 흘린 것이란 말인가! 꼭 처자의 얼굴 때문은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말이 더욱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상견례 얘기까지 나와서 이것만큼은 막아보려고 난생처음 도성 밖으로 나갔다.
산을 계속 넘다가 바다에까지 발길이 닿았는데 하필 상륙하던 몽골군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랫도리가 사시나무처럼 저절로 떨렸고 바지가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으나 얼굴에 최대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풍문이 있지 않은가.
“아이고, 먼 길까지 수고가 많소이다!”
일면식도 없는 적국의 군사들이었지만 우리 땅에 왔으니 반기는 척이라도 하면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으나, 역시 호랑이와 사람은 다른 종족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사람 머리통만한 도끼와 여느 장정의 키보다 더 기다린 칼을 내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 얌전하게 말로 해결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으나 저들은 고려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 했다. 그중에 눈매가 위로 바짝 올라가고 앞니 하나가 빠진 이가, 활시위를 바짝 당겨서 내 얼굴을 겨누고 있었다.
“갈 길이 바빠 보이는데 서로 못 본 걸로 합시다!”
애써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활시위를 더 바짝 당겼고 도끼를 양손에 들고 다가왔다. 한 발짝씩 물러나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머리 위로 화살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갑자기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는데 몽골군 쪽에서 날아드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걸어왔던 쪽이었다. 신음이 들리고 곧이어 함성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난 눈을 질끈 감고 아버지와 어머님, 조상님, 천지신명 등 당장 떠오르는 이름은 다 불렀다. 심지어 급사중 어른의 셋째 딸까지도.
죽은 듯 누워있는 내 뒷덜미에 묵직한 손길이 닿았다. 햇빛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민머리인 건 확실했다. 발끝까지 힘을 꽉 줬으나 복날에 시전 왈패한테 발로 걷어차인 똥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많이 바빠 보이는데 왜 자꾸 나만 가지고 이러는 게요.”
내 두 손은 불이라도 지필 듯 바삐 비벼대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옷차림새가 이상했다. 잿빛 옷에 붉은 천을 두르고 팔에는 염주를 두르고 있었다. 얼굴 곳곳에 주름살이 깊게 자리 잡은 노승이었다. 누구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전투장을 빠져나와 산성으로 돌아왔다.
“인연이 다가올 땐 기쁘게 받아들여야 화를 면하오.”
우리 집 방향으로 동행하던 노승은 시전 초입에서 멈춰 섰다.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니 함께 집에 가서 크게 대접하겠다고 권했다. 그러나 “인연이 닿으면 그때 그리합지요”라는 말과 함께 합장한 뒤 시전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뒤따라가고 싶었으나 군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스스로 낭장이라고 밝힌 자가 한 발 나오더니 지금 당장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야겠다며 팔을 붙들었다.
“내가 몹시 피로감이 몰려든 상태라서, 내일 같이 가면 아니 되오?”
“곱게 따라오지 않으면 포박해서라도 데려오라 명하였소.”
낭장 옆에 있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덩치가 산짐승처럼 우람한 군사 한 명이 빨갛고 굵은 줄을 꺼내 들었다. 결국 군사들을 곱게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궁이나 관청이 아니라 어쩌다가 우연히 저절로 한 번은 갔었던 급사중 어른 댁이었다. 마당에는 군사들과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그중 우리 부모님이 급사중 어른과 나란히 서 있었다.
“자네 왔는가!”급사중 어른이 아버지보다 훨씬 밝은 표정으로 두 팔 벌려 다가왔다. 얼떨결에 안기긴 했으나 아버지와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한결같이 나를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셋째 딸은 나를 흘낏거리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다시 봐도 절대 나라를 기울어뜨리지 않을 것이 확연해 보여 이상하게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자네가 나라를 지켰네. 지켰어! 글만 보는 줄 알았건만 무관의 기질이 있구먼. 자고로 사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과연 내 사위일세!”
급사중 어른은 입가에 침이 새는 줄도 모르고 귓구멍이 따갑게 목청을 높였다. 나를 곱게 데려온 낭장에게 사정을 들어보니 그 몽골군은 궁을 은밀히 침투할 별동대였다는 것. 나 홀로 그들을 붙들어준 덕분에 정찰하던 우리 군사들이 기습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있었다고 했다. 생포된 몽골 군사 중 한 명은 나를 조정 고위 관리로 여겨 사로잡으려고 했으나, 내 현재 신분을 알고 까무러쳤다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난 급사중 어른의 당연한 셋째 사위가 되었다. 처가에서 장인어른의 사적인 일을 도우며 학문에 정진했다. 당장 관직에 들어오라는 강권이 있었으나 어떻게든 과거를 통과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처가와 우리 집안이 조정 환도에 맞춰 개경으로 이주하면서 그 고집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개경 환도를 조정의 모든 관료가 반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반대하는 쪽이 더 많았다. 우리 집안도 마찬가지였으나 처가는 달랐다. 장인어른이 폐하의 충신이었고 무신들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장인어른보다 비교적 낮은 관직에 종사했고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바, 우리 집안도 이를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다. 결국은 개경에는 실무 관리들이 절반 정도만 완전히 이주했고, 조정에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장 들어오게!”
장인어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입관하라고 강권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계속 버텨왔으나 하필 이때쯤 아내가 입덧을 시작해버렸으니, 결국 음서로 중서문하성에 들어갔다. 말만 조정 관리였을 뿐 집에서처럼 장인어른의 허드렛일을 돕는 게 전부였다. 동료들은 귀족 출신이 아닌 나를 거의 없는 사람 취급했고 하루하루 늘어나는 건 장인어른의 역정과 다리에 멍 자국이었다. 문하시중 어른 앞에서는 골골거리던 양반이 나만 보면 대장군 부럽지 않을 힘으로 발길질하다니.
환도가 완전히 마무리될 즈음 조정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남쪽 바다 너머 탐라가 수상쩍다는 것이었다. 감귤과 전복, 말 등 진상품이 올라오지 않은 게 벌써 반년을 넘겼고, 조정에서 파견한 탐라부사가 상서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 이때쯤 강화에서는 남은 관리들이 삼별초와 함께 결사항전의 뜻을 비쳤다. 조정에서 사람을 수차례 보냈으나 그들은 완고했다. 결국 조정은 그들을 반군으로 여기고 몽골군과 함께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탐라와 관련된 소문은 점점 커져서 삼별초와 손을 잡았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그때쯤 퇴청하는 길에 나를 구해준 노승과 우연히 재회했다. 그는 조정이 환도할 때 나처럼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새 삶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절대 피하지 마시오.”
만나자마자 이 한마디를 남기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했으나 이번에도 다음 인연을 기약하자고 했다. 그날 밤, 장인어른은 술상을 차려놓고 나를 불렀다.
“자네가 아무래도 다녀와야겠네.”
“어디를 말씀이옵니까?”
“탐라 말일세. 새로 부임할 탐라부사한테 따로 얘기해뒀네.”
조정에서는 탐라부사를 새로 임명하고 그와 함께할 비공식 진상조사단을 꾸렸다고 했다. 여기에 합류하여 탐라 상황을 면밀히 살펴본 사실 그대로 기록하되, 누구도 거치지 말고 반드시 자신에게만 보고하라고 했다.
“제가 뱃멀미가 있사온데.”
강화에서 내륙으로 넘어오는 배를 타는 동안 멀미 때문에 혼절한 모습을 장인어른이 똑똑히 봤었다. 고향이 그리워질지언정 어떤 일이 있어도 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건만, 장인어른이 던진 술잔에 다짐을 잠시 미뤄두는 걸로 했다. 꼭 장인어른 눈치를 보겠다는 건 아니고 노승이 해준 얘기가 신경 쓰이고, 아내가 밤마다 나를 부르기도 하고…….
며칠 뒤 탐라부사 일행으로 합류하여 탐라행 배에 올라탔다. 배웅하러 나온 부인이 돌아오는 날에 진하게 위로해주겠다고 해서, 천천히 돌아와도 부디 노여워하지 말라는 대답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게요. 입을 것 좀 구해주시오!”새 삶은커녕 눈을 뜨자마자 거의 알몸으로 저승길에 따라가는 신세라니. 저자는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걸음을 재촉해도 당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맞바람이 불면서 몸의 중심을 흐트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딱히 내키는 길은 아니지만 기왕 갈 거 사이좋게 가자고 소리치자 그가 돌아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무사 경 못 따라왐수광!”“거참, 나 무사가 아니오! 아까부터 무사라고 하는데, 혹시 사람 잘못 데려온 거 아니오?”“아까부터 무신 소리를 고람신지. 늦엄시난 혼저 가게마씸.”
“갑자기 혼자 가라니!”
계속 무사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혼자 가라니,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원래 저승 가는 길은 푸대접이었다니, 이 원통함을 누구에게 이른단 말인가. 아이고, 조상님!
“예게, 혼저 가게마씸!”
“거참, 혼자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는 주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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