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안개가 물러난 하늘엔 붉은 꽃이 피었다. 텃밭에 만발한 감자꽃과 그 너머 수평선도 붉게 물들었다. 먼저 앞장선 지슬도 금세 붉은 빛에 뒤덮였다. 넓고 딱 벌어진 그의 어깨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이상하게도 축 쳐져 있었다. 발걸음은 힘이 빠졌고 몇 발짝 걷다가 멈칫하며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소?”
“어수다.”
“어수다? 무슨 말인지…….”“어서마씸게!”
“예예, 어서 갑시다, 가!”
대답은 하지 않고 어서 가자니, 보면 볼수록 성미가 급하단 말이지. 우리는 바다를 곁에 두고 말없이 걸었다. 길가에 초가 몇 채와 지슬과 비슷한 복장의 주민 몇몇이 보였다. 지슬과 인사를 나누는데 난데없이 편안하냐는 물음 외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 걷다 보니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는데 거기서 물이 샘솟아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여길 중심으로 주변에 집들이 여럿 보였고 그 옆에 높게 쌓은 벽과 여느 장정의 키보다 곱절이나 높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는 커다란 횃불이 타올랐고, 창으로 무장한 사내 둘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오? 관아 같소만.”
“그 비슷헌 거우다.”지슬은 뒷짐을 지고 여기가 어디인지 한참 설명해줬는데 그중 대충 알아들은 것으로 정리해보자면, 탐라는 고려의 한 지방으로 흡수된 이후 각 지역 현청을 대폭 축소했다. 대신 각 마을 촌장이 탐라부사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처리한다는 것. 특히 애월은 탐라국이었을 때부터 교통이나 방위 등에 중요한 지리적 거점 중 하나여서, 촌장의 권한이 여느 관아 수장과 맞먹고 종종 군사들이 훈련을 명목으로 주둔한다나 뭐라나. 원래는 여기도 관아였으나 관리들은 없고 촌장이 직접 관리하며 사가처럼 사용하는 중이라고 했다.
“무사 왐신고?”
“촌장님 이수광?”
문을 지키던 사내 중 한 명이 지슬과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나와 함께 안으로 들여보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오른쪽 눈에 칼자국이 선명한 그는 뒤따라 들어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일부러 눈을 똑바로 쳐다봤더니 갑자기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게 아닌가, 절대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재빨리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담이 높은 걸 제외하고는 까만 기와로 만든 지붕이 웅장해 보였을 뿐 관아보다는 마당만 넓은 큰 집에 가까웠다. 집을 받치는 나무 기둥은 그리 굵지도 않고 군데군데 시커멓게 썩어서 구멍이 난 곳도 있었다. 곳곳에 횃불이 타올랐고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안채 툇마루에는 흙빛 무명천을 입은 노인과 군복 차림의 젊은 사내가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자 근처에 있던 무장한 군사들이 다가와서 가로막았다. 지슬은 물러나지 않고 더 앞으로 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마 촌장을 만나는데 성주처럼 까다롭게 구냐는, 그런 어감이었다. 멀뚱히 서 있던 나는 군사 중 한 명하고 눈이 마주쳤다. 입구에서 봤던 사내가 새삼 떠오르고 갑자기 달이 보고 싶은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올라갔다.
“무사 경 시끄러웜시냐!”
노인이 술잔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마주앉은 무관도 함께 일어나면서 손짓하자 군사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물러났다. 지슬은 나를 제 옆으로 끌어당긴 뒤 저 노인이 바로 촌장이라고 귀띔했다. 똑바로 서서 내게 시선을 고정하는 촌장의 눈빛은 매서워서 나도 모르게 땅바닥이 어떤지 보고 싶게끔 했다. 바닥엔 역시 잔잔한 돌멩이가 난잡하게 널브러져있었다. 지슬은 촌장과 큰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여기서도 편안하냐는 첫 질문부터 시작해서 어머니가 어떠하고 바다에서 건진 게 뭐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내용인 듯한데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디는 어떵 왐수광?”
지슬과 대화하던 촌장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어느새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모두 내게 몰려있었다. 바짝 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묻힌 뒤 먼저 내 신분부터 밝혔다. 여기까지 온 연유와 당장 탐라부사와 만나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촌장은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가만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했다. 다만 무관이 그의 귀에다 대고 눈치를 보면서 조금 오래 속삭였다. 촌장의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고 좀 전까지 보이지 않던 주름이 이마에 굵게 드러났다. 뒤에 있던 군사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굵은 줄로 내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건 군사들의 무차별적인 발길질이었다. 지슬은 소리를 지르면서 내게 다가오려 했으나 군사들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촌장은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서 다소 높은 억양으로 무슨 말을 계속해댔으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눈이 시뻘겋게 변하고 목소리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고 말을 더듬기도 했다.
“넌 어디서 왔느냐?”조용히 뒤에 서 있던 무관이 촌장 옆으로 다가섰다. 억양은 촌장이나 지슬과 별로 차이가 없었으나 최소한 내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조금 전에 설명한 그대로라고 대답하니,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이유인즉슨 요즘 탐라는 육지나 송나라, 왜나라, 유구 등에서 넘어온 표류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 내가 생긴 건 왜구와 닮았으나 고려말이 아주 능숙한 걸 보아 육지 어딘가에서 큰 죄를 짓고 도망쳐온 게 분명하다고 했다. 처음 볼 때부터 바로 알아차렸지만 그나마 내 거짓말이 너무 그럴싸해서 들어봤다며, 당장 어디서 무슨 죄를 짓고 여기까지 도망했는지 밝히라고 했다. 조정에서 보낸 내게 이러는 건 나중에 큰 후회를 남길 것이라고 엄포까지 놓았으나 오히려 비웃음만 되돌아왔다.
“게난 어디서 왐신지 고르라.”그중 뒤로 자지러질 정도로 제일 크게 웃던 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함께 웃던 무관도 다시 입을 열며 어디서 왔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대답하자 아예 듣지도 않고 촌장과 무관은 번갈아가면서 다그쳤다. 한 사람은 고르라하고 한 사람은 말해보라니, 도대체 뭘 고르고 말하란 말인가. 심지어 뒤에서 “뭉케지말앙 재게 고릅써게!”하는 지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더러 뭘 고르란 말이오!”
몸부림하며 소리쳤지만 내 몸을 묶은 줄이 더 조여오기만 할 뿐이었다. 계속된 승강이에 땀이 얼굴을 뒤덮었고 다리는 힘이 풀려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포박해놓은 몸, 제대로 앉게라도 해달라고 청하자 무관이 곧바로 턱짓했고 뒤에서 군사 한 명이 엉덩이를 거세게 걷어찼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으나 내 소원대로 앉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엉덩이가 바닥에 박힌 돌멩이를 깔고 앉았다. 도로 일으켜 달라고 했다가 뾰족하게 세운 무관의 눈과 마주친 뒤 혼자 중얼거리는 척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렸다. 다시 촌장과 무관의 질문이 이어졌고 같은 대답만 하다 보니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뒤에서 소리치며 나를 대변해주는 듯한 지슬은 그사이 다른 군사들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쫓겨난 상태였다.
“혼 번만 더 물어볼켜이. 육지서 뭣허당 내려왐신지 졸바로 고르라.”
촌장의 얼굴도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내가 도대체 뭣하다가 내려온 건지 왜 고르기까지 해야 하는 지, 오히려 되물었다가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되게 욕지거리 느낌이 섞인 큰소리로 귀만 괜히 얼얼했다.
그 사이 무관은 바깥에서 급히 달려온 군사와 대화를 나누더니 촌장 곁으로 다가갔다. 귓속말로 무관의 얘기를 듣던 촌장은 갑자기 사레가 들려 헛기침을 연발했다. 군사 두 명이 다가와 내 팔을 붙들면서 일으켜 세웠고 무관이 자신의 얼굴을 내 귀에 바짝 갖다 댔다.
“소원이라니 데려다주지.”뒤통수가 싸해지더니 금세 눈앞에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팔다리부터 온몸에 힘이 빠져 상한 물고기처럼 축 늘어졌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땐 주위가 온통 어두컴컴했다. 지린내와 악취가 코와 입에 모두 침투하여 호흡곤란까지 일어난 건 굳이 원하지 않은 덤이었다. 낯선 이들의 숨소리와 심지어 코고는 소리까지 들렸다. 최대한 정신 집중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의 형태가 어렴풋하게 몇몇 드러났다. 바닥은 지푸라기 느낌인데 푹 젖어있었고 매우 끈적끈적했다.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에 묵직한 손이 내 허벅지를 꽉 눌렀다.
“가만히 있으시게.”목소리는 작았지만 굵직했고 가래가 좀 끼어있는 듯 걸걸거렸다. 그런데 묵직한 손이 좀처럼 내 허벅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샅으로 점점 올라오는 거 같기도 하고. 어두워서 아직 제대로 초면도 아닌데 어찌 그리 무례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다른 손이 먼저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하래도!”
이번에는 가늘고 날카로운 남자 목소리였다. 손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로 헛구역질과 어지럼증이 돋아났다. 몸부림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시 힘이 빠져나갔고 그대로 까끌까끌한 바닥에 머리를 뉘었다. 속은 계속 매슥거렸지만 코는 점차 냄새에 무뎌지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양쪽으로 눈빛 두 개씩이 나를 향해 비췄다.
“날이 밝으면 알게 될 것이오.”
오른쪽 귀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어차피 알아야 할 것, 당장 알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가 내 입을 막은 손이 갑자기 힘을 주기 시작했다. 코가 무뎌진 줄 알았는데 금세 냄새에 취해 머리가 몽롱해져 눈이 점점 무거워졌다.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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