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코끝이 시큰하더니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 양쪽 눈꼬리에 맺힌 물방울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드디어, 내 존재를 제대로 알릴 기회가 왔는데도 막상 말하려니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짧고 굵게 서렸다. 내 얼굴을 만져대는 자의 눈빛이 사냥감을 앞에 둔 이리와 비슷하다고 할까나, 귓가에는 나와 한 공간에 있었던 그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재게 고르라. 육지서 왐시냐?”여기서 갑자기 또 뭘 고르라는 건지, 육지가 아니라면 어디를 고르란 말인가. 비록 지금은 거지꼴에도 못미치는 몰골이지만 장인어른의 촉망 받는 셋째 사위인 나, 박익자. 어찌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거짓으로 잠시 피할 수 있을꼬. 탐라에 내려와서 여태껏 그래 왔듯 한 치의 보탬과 감하는 것 없이 내 신분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밝혔다. 더불어 당장 성주를 만나야겠고 내 일행의 생사를 알아야겠다고 했다.
“무신거 어떵?”
나를 쳐다보던 관리의 콧방귀에 몇 가닥 겨우 붙은 수염이 달랑거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를 동원하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함께 있던 군사들이 앞니를 드러내며 피식했다. 정녕 성주가 여러 사정으로 바쁘다면 다른 관리라도 만나서 책임 있는 설명을 들어야겠다고 하자, 돌아온 대답은 내 오른편에 있던 군사의 돌 같은 주먹이었다. 순식간에 오른쪽 눈으로만 앞을 볼 수 있었다. 내 비록 무관의 호방함을 지닌 사내지만, 주먹으로 답하는 건 조정 관리에 대한 예가 아니라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고 타일렀다. 관리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누렇게 뜬 이를 드러내며 살포시 웃었다. 심호흡을 깊게 한 번 내뱉고 발로 내 배를 꽤 묵직하게 밀어냈다. 중심을 잃고 창살에 기대어 잠시 주저앉았다. 딱히 쾌적하고 안락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쉬는 건 여태껏 실컷 했으니 이젠 격식 있게 대화를 나누자고 또 한 번의 겸양으로 일어났다.
“야이 대맹이가 헤끔 어떵 된 거 아니? 나신디 자꾸 무신거랜 고람시냐!”
드디어 꽤 긴 대답이 돌아왔다.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뒤집혀서 발음조차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책임자와 면담을 원하니 안내해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관리는 내 멱살을 붙잡고 한참이나 침과 약간의 콧물까지 튀겨가며 무어라 소리치다가 결국 군사들과 함께 나를 바깥으로 안내했다.
갑자기 밝게 내리쬐는 햇볕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군사들은 내 팔을 바짝 당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져 코가 땅바닥에 닿을 뻔했으나 두 사람이 꽉 붙들어준 덕분에 겨우 다시 일어났다. 다소 거칠었지만 잘 붙들어줘서 고맙다고 속삭이자 이에 보답하듯 뒷덜미까지 잡아주며 더 빨리 가자며 속도를 냈다.
굵은 기둥에 널찍한 까만 기와지붕이 있는 건물들 사이로 돌을 평평하게 깔아놓은 길이 보였다. 지금 어딜 가는지 물었더니 조용히 하면 알아서 데려다준다며 주먹으로 내 입을 살포시 눌러줬다.
내 발이 멈춘 곳은, 목을 뒤로 바짝 젖혀야 보일 만큼 높은 까만 기와지붕 건물의 앞뜰이었다. 완전무장한 군사들이 대열을 맞춰 앞뜰 중간에 선 그림자를 향해 서 있었다.
“야이가 가이냐?”
금색 투구를 쓴 군사가 다가와서는 내 정수리부터 발뒤꿈치까지 손으로 더듬었다. 갑자기 내 몸을 왜 만지냐고 묻자 칼자루로 배를 쿡 찔렀다.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몇 마디 하다가 직접 내 뒷덜미를 붙들고는 여기까지 동행한 군사들을 돌려보냈다. 옷이 더 상할지도 모르니 뒷덜미보다는 팔을 잡아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가 괜히 거친 손맛에 속만 괜히 울렁거렸다.
“앉으라.”
앞뜰 중간에는 통나무로 만든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다리가 길이가 제각각 달라서 앉자마자 급격한 흔들림에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어온 노고를 알아주고 쉬게 해준 배려에 감사하다고 묵례했다. 군사는 기울어진 투구를 고쳐 쓰며 헛웃음을 뱉은 뒤 맞은편에 있는 그림자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에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그림자의 모습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났다. 관복인데 소매가 땅에 닿을 듯 축 늘어졌고 가슴팍은 금색 실로 새와 비슷한 형상의 자수가 놓여있었다. 머리에는 금관, 목과 팔은 역시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여럿 달아놓은 상태였다. 그가 몇 발짝 움직이자 녹색 관복을 입은 남자와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 들이 한 몸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개경에서 왔느냐?”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 나를 안내한 군사들과 달리 유창한 고려 말투에 고개가 절로 올라갔다. 너부데데한 얼굴에 백옥처럼 말끔한 피부, 큰 붓으로 한 획을 그은 듯 짙은 눈썹, 아기 주먹을 갖다 붙인 것처럼 뭉툭한 코, 생선 알처럼 두툼한 입술로 개경에 흔히 볼 수 있는 생김새가 아니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 거친 손길로 의자에 앉혔던 군사가 달려들어 발바닥을 내 코앞까지 바짝 들이밀었다. 햇볕은 이미 구름이 가려주고 있으니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하자, 군사는 씩씩거리며 큰소리로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놨다. 그러나 내게 개경에서 왔느냐고 물어본 자는 뒤로 넘어질 듯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녹색 관복을 입은 자 중 한 명이 그를 부축하며 “성주님!”하고 외쳤다.
“과연 물건이로구나!”
웃음을 멈춘 그는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날씨도 찌뿌듯한데 이렇게라도 웃으면 좋지 않겠냐고 나도 같이 웃었다. 그것도 잠시, 등골에 땀 한 방울이 아주 천천히 흘러내렸다. 내 주변 모든 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고, 발바닥을 보여줬던 군사는 이젠 칼자루까지 만지작거렸다.
“그대가 정녕 중서문하성 소속이란 말인가?”
성주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표정을 돌처럼 굳히더니 쪼그려 앉았다. 나를 올려다보며 다시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가 태자였던 시절, 개경에서 생활해왔다는데 그때 조정 관리들과 숱하게 만나왔고, 그중 몇몇은 지금까지도 돈독한 친분을 쌓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이 봐온 중서문하성 관리들은 날카롭고 은밀하고 명확한 사람들만 있는 곳이었다며, 행동 뿐만 생김새와 말투 자체가 남들과 다른 기운이 있는 걸 느꼈다고 했다. 아무리 전란으로 조정이 흉흉해도 절대 나 같은 사람을 그곳에서 뽑아서 쓸 리가 없다며, 신임 탐라부사 일행으로 둘 이유는 더욱더 없다고도 덧붙였다. 도대체 누구의 종놈이며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여기까지 내려왔는지 똑바로 고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아주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풀어놓으니 재미있게 봤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농은 먹히지 않을 것이라며 눈을 부라렸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내 신분을 믿지 않으려는 것인지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손을 살짝 들어 손짓했고 군사 한 명이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 직접 소매를 걷어 상자 뚜껑을 열어서 내게 들이밀었다. 그 속에는 낯익은 얼굴이 눈을 감은 채 들어있었다. 나와 같은 배를 함께 탔던 탐라부사의 직속 부하로 뱃멀미에 혼절하기 직전까지 나를 부축하며 등을 두드려줬던 자였다. 감옥에서 함께 있던 자들이 나눴던 대화가 다시 머릿속을 깊게 파고들었다.
“네놈 목도 여기에 담아주랴?”
낮고 굵직했던 성주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날카로워졌다. 뒤에 서 있던 관리로부터 서책을 건네받은 성주는 몇 장을 뒤적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건 탐라부사와 그 일행의 신상이 담긴 기록이었다. 몇 장을 더 훑어보던 성주는 내 이름을 재차 물었다. 다시 몇 장을 더 훑어보더니 아예 서책을 바닥에 던졌다.
“네놈 이름은커녕 성씨도 없구나!”
성주는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곧이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군사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는데 누구도 말릴 기미가 없었다. 보다 못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와 나를 줄로 묶어두긴 했으나 허술하여 성주와 말하는 동안에 풀려있었다. 저 서책에 내 이름이 없는 건, 내가 황당하고 화낼 일이지 성주가 대신 그럴 건 없다고 타일렀다. 순식간에 다른 군사들이 달려와서 다시 의자에 앉히고 어깨를 꽉 눌렀다. 성주는 발길질을 멈췄고 맞고 있던 군사는 피를 약간 토해내며 슬슬 일어났다.
“네놈이 정신을 바다에 내던졌구나!”
성주가 일어나던 군사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아서 내게 겨눴다. 명단에서 빠진 건 내가 분노할 일이니, 이젠 내게 잠시 화낼 기회를 넘겨주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가 목젖에 칼끝이 닿고 말았다. 성주의 눈은 초점이 사라졌고 흰자에 핏줄을 바짝 세우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데끼라!”
성주가 칼을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마저 일어난 군사가 칼을 주우면서 내 목에 겨누자, 성주가 그의 팔을 걷어내며 “경허지 말앙 바당에 데껴불라!”하고 소리친 뒤 돌아갔다. 곁에 있던 군사들이 일으켜 세우더니 굵은 줄로 꽁꽁 묶었고 뒷덜미를 붙들며 의자에서 끌어냈다.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냐고 묻자 그보다 더 시원하고 좋은 곳에 갈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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