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랗게 뜬 그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눈시울은 아직 뜨거운 기운이 식지 않았으나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드러났다. 불규칙하면서도 빠르게 뛰던 심장은 점점 평온을 찾아갔고 호흡이 고르게 펴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도, 앞니를 슬며시 드러냈다.
“아이고, 어떵된 거꽈!”
이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촌장의 집에 함께 간 이후 통 소식을 알 턱이 없었던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다니. 분명 군사들 손에 이끌려 간 그의 모습이 아직 내 기억에 생생한데 말이다. 그대야말로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그는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갖다 대며 고갯짓했다. 내 손목을 슬쩍 끌어당겨 노인이 있는 건물 뒤편으로 이끌었다. 그곳은 또 다른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기둥은 굵었으나 지붕부터 문까지 모두 낡았고 끄트머리엔 부서진 자국도 보였다. 그 건물 앞뜰에는 지슬과 비슷한 차림의 장정들이 기합과 함께 동작을 맞춰 움직였다. 그중 몇몇은 분명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붉은 햇볕을 담은 자신의 칼끝에만 시선이 집중되었을 뿐.
길게 가지를 내려뜨린 큰 나무 아래 평평한 돌바닥에 먼저 자리 잡고 앉은 지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이마부터 목까지 군데군데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그의 집에서 마주 앉아 감자를 먹었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아직 핏자국이 선명한 부분도 보였다.
“경 이실거꽈?”
지슬은 자신의 옆을 손바닥으로 쓱 닦아냈다. 곁에 앉아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상처는 물론이고 눈 아래가 검게 변해있었다. 그는 그저 쳐다보며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말없이 그와 같은 곳을 쳐다봤다. 앞뜰에는 붉은 기운이 점점 짙게 감돌았고, 장정들의 기합은 조금 전보다 살짝 늘어졌다.
“이디 영 이실 지는 몰람신디.”
어느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내뱉는 그의 말에 귀를 세웠다. 촌장의 집에서 내가 사로잡혔을 때,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성주청으로 압송되었다는 얘기부터가 눈이 절로 동그래졌다. 의자에 묶여 무조건 당장 참수에 처할 죄를 지었으니 당장 자백하라며 다그쳤다던데. 처음엔 압송한 말단 군사가 그랬다가 담당 교위가 나서서 직접 고신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틴다면 가족까지도 모조리 잡아들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앞서 잡혀 온 자가 이처럼 버텼다가 일가족을 참했다는 얘기를 보태기도 했다. 결국 그는, 무조건 죽을죄를 지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게민 영 허는 건 어떨 거 닮으냐?”
주먹으로 그의 뺨을 한 대 후려친 교위는, 성주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참형만은 피할 기회를 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냐고 물었다. 물론 가족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다른 여기로 오게 되었다. 본성 외부에 있는 작은 산성인데, 원래는 주민이 많은 촌락이었으나 역병이 심하게 창궐한 이후 거의 빈 것과 다름없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물론 원주민은 일부는 살고 있었으나, 성주청에서 일품군 주둔지 중 하나로 정했고 대대적인 성벽 보수 작업이 들어간다고까지 소문이 돈 상태였다. 굳이 그 근처라도 가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곳이었다.
그가 산성에 다다랐을 땐 혼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이유로 온 이가 있었고 마을 촌장이 탐라를 위해 공헌한다면 앞으로 집안 식구가 배고플 일이 없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따라온 이와 아는 사람이 가서 따라온 이, 집으로 가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반강제로 끌려온 이까지. 탐라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이었다. 산성 내부에 있는 진지 앞으로 모이게 했고 곧이어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 세 명이 등장하더니 모인 사람들을 전부 실오라기 하나 없이 옷을 벗겼다. 끝은 뾰족한데 제법 굵직한 나무 막대기로 모아둔 자들의 어깨와 허리는 물론 팔다리까지 툭툭 두드리고 찔러 보기까지 했다. 몇몇이 항의하자 그 자리에서 발길질로 목소리가 다신 못 나오게 했다. 이 중 몇몇 직접 골라내어 따로 모아두고 나머지는 다른 데로 보냈는데 분명한 건 들어온 입구가 아닌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이 와중에 그는 따로 모아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진지 안으로 들어왔고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마당에 다시 줄 맞춰 세워 놨다. 도대체 여기서 무얼 해야 할지 서로 물어볼 틈도 없이, 조금 전 나와 술상을 함께했던 노인이 군사 몇 명과 나타났다. 목검을 열 자루를 사람들 앞으로 던져두고, 여기서 딱 열 명만 남기고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만약, 열 명 안에 들지 못 한다면 살아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지슬을 포함하여 대략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은 그저 서로 눈치만 봤다. 노인과 함께 온 자 ―그에게 생김새를 들어보니 나 때문에 넘어졌다가 일으켜 세워줬던 아마 그자인 듯― 가 어서 움직이라고 윽박질렀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차고 있던 진검을 뽑아내어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에게 휘둘렀다. 피를 뿜어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자, 호흡마저 잠시 멈추고 잠시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순식간에 흰자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목검을 쥔 자가 가까이 있는 아무나 한 사람을 붙잡고 후려쳤고 그것도 잠시, 먼저 목검을 차지하지 못 하더라도 힘과 약간의 무예로 빼앗아서 휘두르기도 했다. 그 사이 대여섯 명은 바닥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심지어 바닥에서 돌과 모래, 굵은 나뭇가지를 주우면서까지 서로 엉켰다. 이들의 목소리는 굶주린 맹수와 같았고 마당에 흙은 핏방울로 젖어들었다.
해가 질 때까지 신음이 끊이지 않은 그 결과, 아홉 명이 제힘으로 겨우 서 있었다. 나머지는 호흡조차 버거워했고 이미 몸이 굳어서 썩은 내를 풍기는 자도 있었다. 살아남은 아홉 명은 군사 한 명의 안내를 받아 안채로 들어갔다. 끝내 일어나지 못 한 자, 생존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대껴버리라는 말에 한 사람이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몇 발자국 움직이자 군사 한 명이 달려와서 부축해줬다. 앞서 간 사람들과 함께 안채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지슬이었다.
내가 들은 내용을 이렇게 이해하면 되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이후, 안채에서 며칠간 쉬면서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고 몸도 많이 회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며칠에 한 번씩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중이라고 했다. 남은 자들은 누구라도 이곳을 섣불리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떵 헐 거라?”
몸을 완전히 회복한 뒤 노인과 다시 만나게 됐을 때였다. 다른 사람들도 함께였는데, 노인의 첫 질문이었다. 이 자리에 섰다는 건, 자의와 타의는 관련 없이 누군가를 죽게 하고 살아남은 증거라며. 그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목숨은 영예롭게 바치지 않겠느냐고 했다. 천년의 얼이 살아있는 땅, 탐라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용기가 있다면 영예로움 하나만큼은 반드시 지켜준다는 약속과 굳이 함께하고 싶지 않겠다면 기회를 준다는 선택도 내밀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노인의 곁에 있는 군사들이 포박한 사람을 앞으로 끌고 나왔다. 선택에는 분명한 값을 치러야 할 것이고, 나중에라도 변심한다면 역시 같은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과 함께 칼끝이 바람을 가르며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혼디 헐 거라?”
한껏 낮게 내리깐 노인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서로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한목소리로 “예”하고 하늘 높이 외칠 뿐이었다. 지슬도 얼결에 목소리를 보탰고 그것이 지금까지 여기서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일품군이라면 지방에서 주로 노역에 동원되는 일반 백성들이 아니었던가. 지슬이 이야기하는 동안 눈앞에 펼쳐진 장정들의 훈련 광경은 도성 육위 군사들과 버금갔다. 진검으로 합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해서 두 명씩 짝지어서 대련하는 모습이 전투에 당장 투입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목소리는 찢어질 듯 점점 높아졌고 눈빛으로만 상대의 살갗을 베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지슬, 그 역시도 처음에 봤던 모습과 달리 눈빛이 제법 예리하게 변해있었다.
“무사 이디까정 온 거꽈?”
그의 물음에 여태껏 거쳐 온 일들을 다 털어놓았다. 지금 탐라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시 물었으나, 그 역시도 아는 게 없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지금 훈련받는 목적조차도 모른 채 그저 이렇게라도 살아야, 살아낼 거 같다는 게 지금 말할 수 있는 모든 이유라고 했을 뿐이었다. 기합은 어느새 줄어들고 눈앞에 있던 장정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건물 곳곳에서 낯선 장정들이 나타나서 마당에 대열을 만들어냈다. 지슬도 일어나면서 엉덩이를 털었다.
“가게마씸.”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술이 거하게 들어온 상태라 잠시 쉬고 싶다고 했으나, 괜히 혼자 어슬렁거리다가는 자신이 여기에 들어올 때 겪은 것을 똑같이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계속 무사로 불리지만 무관의 길은 아직 좀 생각할 문제라고 말하는 중이었는데 그의 손은 이미 내 팔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얼핏 서른 정도 되는 대열의 끄트머리에 쭈뼛거리며 섰다. 지슬은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대며 눈짓으로 그저 앞만 보라고 신호했다. 점점 짙게 불타는 햇볕이 눈앞을 가릴 때, 우리 앞으로 한 사내가 어깨를 펴고 서 있었다. 눈이 부셔서 당장 그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림자만으로도 보통 기운은 아닌 듯했다.
“준비되었느냐!”
그의 목소리에 내 귀가 절로 움직였다. 곁에 수하로 보이는 자가 탐라말로 뒤따라 외쳤고 다시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다시 들어도 확실한, 탐라 사람이 어설프게 흉내 낸 게 아닌 억양과 말투 자체가 완벽한 고려말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지슬의 눈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과연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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