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혼자만이 아니었다. 함께 대열을 이룬 모든 사람은 딱 한 사람, 저자를 뜨겁거나 빛나는 눈길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몇몇은 볼에 눈물방울이 흐르기도 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저자의 한마디에 모두 주먹 쥔 오른손을 바짝 들었다. 나도 서둘러 따라 했으나 왼손이었다. 얼른 내리려고 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지슬이 계속 헛기침을 했으나 그의 눈빛에 이상하게도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른침을 조용히 삼키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았다. 미간에 굵은 주름을 잡은 그. 나도 미소를 유지한 상태로 똑같이 따라 했더니 허리에 손을 얹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던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입꼬리를 살짝 더 올렸더니, 지슬의 손가락이 내 왼쪽 허리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다시 고개를 바로 세우고 손도 얼른 바꿔서 들었다. 눈동자는 위로 살짝 올린 채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담아냈다. 내게 비추는 햇볕이 그리 강하지 않았음에도 얼굴은 뜨거워졌고 뒷목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팔이 저리면서 괜히 숨만 점점 가빠졌다. 어느새 호흡은 오로지 왼쪽 콧구멍에만 의지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내 귓속으로 파고들 때쯤 제법 큰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다.
“못 보던 얼굴이군?”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바로 코앞에 그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내 시선은 여전히 하늘로만 향하고 있었다.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댄 그의 콧김이 내 목과 어깨까지 파고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려다가 그의 얼굴에 타액과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와 바짝 마주 선 그는 얼굴에 묻은 거의 가래 같은 침을 닦아내며 허연 앞니를 살짝 드러냈다. 움찔하여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 그의 손이 순식간에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난 그대가 초면이네만!”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 한껏 힘이 실렸다. 지슬이 몸을 틀면서 무어라 말하려는데, 그가 손을 올려 멈춰 세웠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잠시 쳐다보더니 다시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나도 똑같이 따라 했다가 지슬의 손가락에 옆구리가 또 찔리고 말았다.
“대장신디 경허지 맙써!”
중얼거리듯 내뱉은 지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장이란 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굴 군데군데 긁힌 자국은 있으나 피부가 비교적 말끔했고 수염도 방금 빗질이라도 한 듯 고르게 펴놓았다. 둥그스름하면서도 작은 얼굴형에 코가 오뚝하고 귀는 작은 것이, 땀내가 폴폴 풍기는 가죽 갑옷과 허리춤에 찬 칼만 없으면 사대부 출신 문관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용모였다. 다만 가늘고 살짝 찢어지면서 끝이 삼각형으로 각진 눈매는 전체적인 외형을 뛰어넘는 묘하게 강렬한 기운이 담겨있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그의 눈빛이 스치면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선뜻 움직이질 못했다. 제법 묵직한 목소리를 냈으나 무관의 호령이라기에는 미세한 편이긴 했다.
“고마이만 서 이실거꽈!”
내 옆에 다시 슬쩍 붙은 지슬이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또 깊숙이 찔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톱 끝으로 꼬집기까지. 이를 꽉 깨물었으나 결국은 침과 함께 신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장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닦아냈고 그 손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내 입가와 어느새 그의 다른 손에 잡힌 멱살까지도 같은 타액으로 촉촉했다. 지슬이 양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고 머리를 쉴 새 없이 조아렸다. 점차 얼굴에 붉은 기운을 삭인 그는 심호흡과 함께 옷매무시를 수습했다. 다시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간략하게 내 소개부터 했다. 원래 먼저 소개하려고 했던 것인데, 분위기상 선뜻 말이 안 나왔던 것뿐이라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여기 오기 전 노인과 술자리를 함께했고 앞으로 돈독해질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앞니를 드러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는 마침 다가온 수하에게 귀를 내어줬다. 깊은 한숨과 함께 위아래로 한 번 더 훑어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노인네 마음을 홀린 걸 보아 요망졌군.”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그는 여기 사람에게 모두 들리게끔 중얼거리면서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도 다른 이들처럼 반듯하게 섰지만 도대체 지금 무얼 하는 건지, 물어보려 했으나 일단 지슬부터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대장이란 자의 구호에 맞춰 움직이는 나.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고 엎드려서 팔굽혀펴기와 윗몸도 일으키며, 바닥에 앞뒤로 구르기까지. 속은 아까 마셨던 술이 아직도 출렁거려서 도로 뱉어낼 지경이었다. 침은 최대한 삼켜보고 싶었으나 내가 굴렀던 자리엔 흙이 축축하게 젖어서 뭉쳐있었다. 어떻게든 다른 이들처럼 움직여보고 싶었으나 오른쪽 종아리가 갑작스럽게 돌처럼 딱딱해지고 말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보려고 하자, 이제는 뒷목과 어깨가 커다란 바늘에 여러 번 뼛속까지 찔린 듯 찌릿한 통증을 모셔 왔다. 그저 입만 벌린 채 소리도 못 내는 내게 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찌, 이런 자가!”
내 눈에는 뒷짐을 지고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선 그의 뒤통수가 보였다. 곧이어 지슬과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마저도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점차 어둠에 묻히고 말았다.
“정신 촐립써게.”
지슬의 목소리와 내 뺨에 닿는 차진 손바닥 감촉으로 눈이 서서히 떠졌다. 정신이 돌아왔으니 그만 좀 때리라는 말은 다섯 대를 더 맞고 나서야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빙 둘러서서 각자 한 마디씩 뱉었으나 도무지 무슨 말인지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혀를 끌끌 차면서 눈을 흘기는 건 모두 마찬가지였다.
“뭣들 하느냐.”
대장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몸을 일으킨 뒤 지슬의 부축으로 다시 자리를 찾아가 대열에 합류했다. 대장도 역시 자리로 돌아가 허리춤에 찬 목검을 꺼내 들었다. 그의 손짓과 동시에 대열에서 세 사람이 앞으로 나가자마자 목검을 빼들었다. 나를 비롯해 나머지는 꼿꼿한 자세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기합과 함께 세 개의 검은 차례대로 대장을 향했다. 그는 바로 코앞까지 검이 다가왔음에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어떤 움직임도 없었는데 세 사람이 휘두른 검은 탁,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그 세 사람은 자신의 검을 줍자마자 한쪽에 일렬로 무릎 꿇었다. 대열에는 다른 세 사람이 그의 앞에 섰고 잠시 눈 깜빡한 사이에 검은 바닥을 뒹굴었다. 무릎 꿇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그의 얼굴은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고 새롭게 나가는 자들의 걸음이 느려졌다.
“똑바로 못하겠는가!”
그의 목소리가 마당을 꽉 채울 때쯤 지슬도 일어났다. 함께한 두 사람에는 나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내 허리엔 검이 없어서 도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가 캍 끝을 내게 겨누며 고개를 저었다. 오른쪽 다리는 성치 않고 목도 제대로 안 돌아갈뿐더러, 어쩌다 처음 합류한 것이니 다음 기회에 제대로 해보겠다고 했으나 그가 눈꼬리를 바짝 세웠다.
“적군이 자네 사정을 봐주겠는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 어찌 나약한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말이 끝나기 무겁게 바로 앞차례 사람들과 달리 먼저 그가 칼을 우리를 휘둘렀다. 지슬과 다른 이는 두 손으로 막아내며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나도 그들과 함께 슬쩍슬쩍 물러났으나 움직일 때마다 어깨부터 목까지 찌릿해서 이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검 하나가 바닥에 뒹굴었고 지슬과 함께 선 사람이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지슬은 두 손에 검을 놓지 않고 바람처럼 순식간에 내려치는 그의 검을 묵묵히 막아냈다. 물러나면서 점점 몸을 쭈그리기 시작했지만 지슬은 손바닥에 피를 흘리면서까지 검을 꽉 붙들었다. 주변에선 웅성거렸고 그의 얼굴은 곧장 터질 것처럼 핏줄까지 올라와 있었다. 결국 지슬은 한쪽 무릎을 꿇었으나 그런데도 방어 자세를 꼿꼿이 유지했고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 지슬은 결국 한 손을 바닥에 짚고 나머지 손으로 겨우 버텨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나를 슬쩍 째려보며 더 세게 내리치는 게 아니던가. 여전히 내 손엔 아무것도 없었고 바람까지 일으키는 그의 검을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런데 마침, 내 발 앞에는 작고 둥그스름한 돌멩이 하나가 있었다. 무릎 꿇듯 살포시 주저앉는 척하면서 그나마 통증이 없는 오른팔을 뻗어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검을 다시 위로 치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끝에 힘을 모아 돌멩이를 내던졌다. 동시에 내 목과 어깨, 종아리의 통증이 머리카락을 세워버릴 듯 찌릿찌릿한 기운을 급격히 올려보냈으나 정작 신음이 먼저 터진 건, 그의 입에서부터였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갑자기 뒤로 물러난 그는 휘청거리더니 자신이 든 검을 바닥에 짚고 겨우 서 있었다. 그의 발 앞에 떨어진 돌멩이는 피가 살짝 묻어났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내 바지 앞부분이 아주 살짝 젖어들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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