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젖어든 바지는 금세 엉덩이까지 영역을 넓혀나갔다. 나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더 따가워지려고 하더니 갑자기 내 머리 위로 향했다. 기다랗고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날아왔는데 손을 뻗었을 땐 이미 이마에 혹이 나고 말았다. 발 앞에는 대장이 조금 전까지 휘둘렀던 목검이 떨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라.”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허리를 숙여 목검을 집자마자 그의 그림자가 나를 먼저 덮쳤다. 눈을 크게 뜰 새도 없이 날카롭게 바람이 가르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내 머리에 살짝 닿았다. 붉은 노을빛을 그대로 머금은 진검이 바로 눈앞에 날을 세웠다.
이마에서 찐득찐득한 액체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발등 위로 떨어졌다. 빨간색이었다.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굵게 잡혔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모였는데 공교롭게도 검을 집어든 내 손이었다. 너무 순식간이라 어떤 기억도 나질 않았으나, 내가 잡은 목검은 정확히 그의 아랫배에 붙어 있었다. 그와 난 동시에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그는 칼날보다 더 예리하게 세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핏기가 약간 섞인 침을 뱉어냈다. 지슬은 나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직도 쥐고 있던 목검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웅성거렸고 대장은 다시 칼을 쥐더니 내게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곧바로 일어서고 싶었으나 팔다리 근육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뭉쳐있었다.
“제법이군!”
말끝에 힘을 실은 그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난 주변에 쌓인 돌담처럼 그저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 몇몇이 어서 피하라고 소리칠 정도였다. 결국, 내 오른쪽 뺨에 그의 칼날이 스치고 말았다. 이마에만 머물렀던 뜨거운 기운이 갑자기 뺨에 쏠렸다. 머릿속이 울리고 눈앞이 흐려졌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잔뜩 올라갔고 흰자위를 드러낸 것처럼 뒤집히기까지 했다. 다시 칼끝을 내게 겨눴고 발꿈치를 올린 걸 보아 또 달려들 기세였다. 몇몇이 그만하라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그와 눈을 잠깐 마주치면서 입술을 안으로 말아버렸다. 어차피 그는 내게 질문한 게 아니던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몸이 놀랐으니 진정할 시간을 달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나를 희롱하지 말고 네 실력을 제대로 보여라.”
그가 앞발을 땅에서 완전히 떼어냈다. 상체가 뒤로 기울어지다가 금세 나를 향해 쏟아졌다. 농락은커녕 당장 근육이 뭉쳐서 죽을 지경이라고 소리쳐도 그는 전혀 멈추지 않았다.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좀 전과 확연히 달랐다. 뒷목부터 팔다리까지 소름이 바짝 돋아날, 침조차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지금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을 감는 것, 딱 그뿐이었다.
“무사 경 와렴시냐?”
이마에서 흘러나온 땀 한 방울이 코끝을 지날 때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혀가 꼬이면서도 다소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눈을 다시 뜨고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여기로 오기 전에 함께했던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코가 아직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눈은 반쯤 풀렸고 다리도 역시 비틀거렸다. 칼날은 이미 내 머리 위까지 있었으나 노인과 눈을 마주친 그가 서둘러 거두었다. 바로 달려가서 묵례와 함께 계속 비틀거리는 노인을 붙잡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누구의 부축도 내쳐낸 노인은 비틀거리면서도 내 앞에 다가왔다.
“느 무사 경 허고 이시냐?”
노인의 몸은 계속 좌우로 기울어지면서 넘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 와중에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도 모르게 그걸 잡고 말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의 손은 어느새 내 어깨를 둘렀다. 흐느적거리는 몸과 달리 팔에는 힘이 잔뜩 실렸다. 귀에 대고 방금과 전혀 달리 또렷한 목소리로 같이 가자고 속삭였다. 아직도 팔다리 근육은 뭉쳐서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뒷머리가 바짝 설 듯했지만 노인을 부축하는 듯, 오히려 그에게 부축받으며 앞으로 찬찬히 나아갔다. 대장은 몇 발자국 떨어져서 따라 걷다가 노인이 손짓하자 멈추고 묵례했다. 고개를 올리면서 나를 슬쩍 쳐다봤는데 여전히 눈빛은 날이 바짝 서 있었다.

“그디 앉으라.”
술상이 있던 마루를 지나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이불에 앉자마자 맞은편 방바닥에 나를 마주 앉혔다. 풀려있던 눈은 어느새 힘이 실려 있었고 팔과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자세 역시 꼿꼿했다. 나는 팔다리를 잠시 폈다가 금방 접으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방 안을 슬쩍 둘러봤는데 짐승 가죽들이 벽 곳곳에 한 자리 제대로 잡았다. 호랑이와 곰 가죽이 가장 크게 붙어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장검이 붉은 칼집에 담겨 올려져 있었다. 그 아래엔 탐라 중심부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산과 커다랗게 그린 까마귀가 그려진 병풍이 놓여있었다. 그가 혼자만 깔고 앉은 이불은 무명처럼 보였으나 제법 두툼했고 윤기가 흐르는 목침에는 댓잎 향을 은은하게 풍겼다.
노인은 목침 옆에 둔 술병을 집어 들더니 한 모금 들이켰고 내게도 권했다. 손사래하자 나를 살짝 흘겨보더니 술병을 내려놓았다.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서로 쳐다만 보고 앉아있었다. 뭉친 다리 근육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었다.
그 사이 붉은빛이 감돌았던 문풍지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귀뚜라미보다 까마귀 울음이 더 크게 울릴 때, 그가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두 모금 들이켠 뒤 다시 내게도 권했다. 괜찮다고 했으나 이번엔 술병을 내려놓지 않았다. 헛기침과 함께 코로 한숨까지 내쉬는 그의 얼굴에 결국 술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마루에서 그와 함께 마셨던 술은 지금 내 목구멍을 간신히 넘어가는 것에 비하면 맹물이나 다름없었다. 삼킴과 동시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고 두통과 어지럼증이 함께 기습했다. 입안은 불이라도 삼킨 듯 뜨거운 기운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움은 점점 더 짙어져만 갔다. 눈물과 콧물이 나오는 건 신경 쓸 새도 없었다. 그가 내밀어준 또 다른 병에 든 맹물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재차 심호흡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찬찬히 달래는 사이, 노인의 웃음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경 헐 줄 알았져.”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웃음기를 거둔 노인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느냐고 되물으니 보란 듯이 술병을 입에 또 갖다 대고 한 모금 또 들이켰다. 코끝이 점점 빨개지는 것 빼고는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잠시 또 침묵을 지키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병풍 위 벽에 올려둔 장검을 꺼낸 뒤 다시 앉았다.
“누게가 줨신지 궁금허지 않암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한쪽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앞니 중 하나 없었고 혀끝은 반쯤 갈라져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서 알고 싶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당장 궁금한 건 이 방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딱 그 정도.
“그분이여게.”
그분, 혹여? 나와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얘기를 좀 더 들어보니 내가 지금 생각한 그분이 전투에서 승리한 공을 치하하며 자신이 썼던 것을 직접 하사한 것이라는 내용인 듯했다. 그걸 갑자기 왜 얘기해주냐고 물으니, 검을 칼집에서 뽑아낸 그는 바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빛을 머금은 칼날 아래쪽에는 오로지 그분만이 지닐 수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 여기 탐라가 아닌, 개경 왕궁에 있어야 할 그 문양 말이다. 호흡이 다시 가빠지려는 것도 잠시, 갑자기 바닥에 꽂은 검을 뽑아든 그가 내 목에 겨누었다.
“느가 누겐지 알고이서.”
들릴 듯 말 듯 최대한 낮게 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상에서 내 신분과 처가만 빼고 솔직히 털어놓은 내용이 아니던가. 새삼스러운 얘기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눈에 힘을 줬다.
“아직 고르지 안 헌 게 이실 건디. 아니라?”이 와중에 뭘 고르지 않았다는 건가.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육지, 조정, 관리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들렸고 나머지 내용을 추려본 결과. 내가 어떤 연유로 내려온 건지 확실히 아는 듯했다. 지금 나를 어찌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칼날이 거의 목에 닿을 듯 바짝 붙었다.
“지금 고르라. 나강 가이영 다시 붙젠, 나신디 붙젠?”
나가서 그자와 붙을 것인가, 지금 자신과 붙을 것인가를 고르라는 걸까? 앞뒤 설명도 없이 내가 누군지 안다면서 뭘 붙이려고 하는 건가. 도대체 이 노인네, 나한테 왜 이러는 건가? 난 그거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그의 눈빛은 촛불이 필요 없을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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