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풍지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웠다. 여전히 노인이 겨눈 칼날은 내 목을 향해 있었다.

“무신 일 이수꽈?”

바깥에서 또 다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나와 칼을 나누었던 바로 그. 노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칼끝을 내 목에 바짝 들이밀었다.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안다고 중얼거리듯 내뱉으며 눈짓으로 그림자가 비친 쪽을 살짝 흘겼다. 난 땀과 함께 흘러나오는 콧물을 들이마시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문풍지에 비친 그의 그림자는 흙을 긁어대는 발소리와 함께 점점 커졌다. 노인은 눈에 핏줄을 바짝 세우더니 이를 꽉 깨물었다. 칼끝은 어느새 내 목젖을 아주 살짝 파고들었다. 문풍지에 비친 그의 오른손은 어느새 칼을 뽑아든 상태였고 거의 문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난 얼굴에 땀을 잔뜩 적신 채로 노인의 눈을 마주 보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얼 뜻하는 건지 딱히 생각해볼 겨를은 없었다. 그저 천천히 내 목젖에서 멀어져 가는 칼끝을 보며 맥박이 느려지는 것에 심호흡만 깊게 내쉬었다.

“무신 일 어서.”

노인은 칼을 도로 집어넣으면서 혀 꼬인 소리를 냈다. 살짝 비틀거리는 시늉을 보였다. 정말 괜찮으냐고 재차 묻는 그에게 “어떵 안 허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그는 헛기침을 크게 한번 내뱉으며 문풍지에서 서서히 멀어지더니 그림자를 완전히 감추었다. 그제야 노인은 나와 마주앉았다. 심호흡으로 얼굴의 붉은 기운을 가라앉히고 칼집은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아멩허도 이디서 무신 일이 이실 거여.”중얼거리던 그는 꼬리를 바짝 세운 눈으로 나와 마주봤다. 난 그저 다시 새어나오는 콧물을 삼키다가 완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기침만 연발하다가 멈췄다. 또다시 정적이 어깨를 길고 천천히 짓눌렀다. 등골에 땀이 흐르는 것도 잠시, 다리에 근육 뭉쳐서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그에 반해 노인은 석상이라도 된 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핏줄이 점점 흰자위를 뒤덮어 가는데도 말이다. 결국 난 허리까지 올라오는 경련에 옆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왼쪽 다리를 천천히 펴고 터지려던 비명을 겨우 침과 함께 삼킨 뒤 다시 바르게 앉아보았다. 다시 정적이 어깨와 목까지 휘감았다.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어야 하는지 제발 잠이라도 자게 해달라고 말해도 미동도 하지 않는 그. 결국 손바닥을 비비는 시늉까지 하고서야 칼집을 목침 위에 올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가래 끓는 한숨을 내뱉으며 내게 손짓했다. 뭘 어쩌라는 건지, 눈만 몇 번 깜빡이며 가만히 있자 내 얼굴에다가 발길질하려는 게 아니던가. 아직 근육 뭉친 것이 풀리지 않았으나 얼른 일어나서 그와 마주섰다.

“야이를 어떵 헐 거”

그의 손이 내 얼굴과 어깨를 거쳐 팔과 배까지 한 번에 훑어 내렸다. 급기야 더 아래쪽을 향하는 손에 얼른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물었더니, 내게 중얼거리듯 무어라 한참을 얘기하는 게 아니던가. 그분, 보내신, 어떵, 곱곱허다라는 말만 제대로 들렸다.

“멩심허라이!”

다시 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무사, 와리지마라, 고바지라 등등 들리는 단어로만 조합해본 결과, 그분의 하명이 있을 때까지 여기서 조용히 지내고 절대 성주와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대장과는 최대한 부딪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야 하라는데,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 맞느냐고 물으니 노인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살포시 올렸다.

“어떵 된 거꽈?”

돌아간 숙소에선 모두 잠이 들었고 지슬만이 반쯤 누운 상태에서 눈을 뜬 상태였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니, 하여간 별 탈 없이 다시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린 뒤 먼저 잠이 들었다. 난 지슬이 코고는 소리를 벗 삼아 어둠과 마주하며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웠다. 노인, 그자는 어찌하여 그분을 그토록 기다린단 말인가. 하명할 것이라는 건 어찌 그토록 확신한단 말인가. 나와 함께 내려왔던 부사 어른을 비롯해 일행의 생사를 분명 알고 있을 터, 이런 건 어찌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가. 조정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부닥쳤는지 알고나 있단 말인가. 성주 그자는 어찌 우리에게 이러했단 말인가. 느닷없이 나라를 백번이라도 구할 안사람이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바깥에서 우는 까마귀가 마치 그녀의 웃음소리와 닮은 듯 귀를 간질였다.

“어서 잡지 않고!”

동이 트자마자 대장, 그는 우리를 모두 불러냈다. 전날 했던 노동에 가까운 훈련 대신 내게 목검을 건넸다. 나머지는 전날처럼 앉아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어제와 똑같은 얼굴로 진검을 뽑아들었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건 대답 대신 눈앞을 예리하게 스쳐간 그의 칼날이었다. 뒤로 물러나려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검은 손에서 멀찍이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군지 정체를 밝히지 못 하겠느냐!”

그는 두 손으로 칼자루를 꽉 쥐더니 곧장 내리꽂았다. 분명 얼굴로 다가오던 것이 바로 코앞에서 방향이 틀어지더니 귀 바로 아래에 땅바닥으로 깊이 박혔다. 볼에 뜨거운 것이 올라와서 따끔거렸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푸르게 칠한 하늘에 검은 점이 되어 날아다니는 까마귀를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을 뿐.

“실성한 것이냐, 혹여 또 나를 희롱하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지만 입은 가만히 있었다. 눈과 머리도 그저 제자리를 빙빙 도는 까마귀에 온통 신경이 집중되었다.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어느새 벌레의 날갯짓처럼 윙윙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곧이어 옆구리에서 스며든 통증이 정수리까지 급작스럽게 올라오더니 그의 발바닥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도대체 몇 번째란 말인가, 다시 눈을 떠도 바닥은 여전히 돌이 곳곳에 널브러졌고 하늘은 여전히 넓었고 코끝엔 비린내가 맴돌았다. 무엇보다 내 옆엔 지슬이 앉아서 그저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지 물어보니 대장이 오늘은 도저히 훈련할 수 없으니 모두 알아서 쉬라 하며 자신의 침소로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오른쪽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고 무거워서 손으로 만져봤더니 따끔거려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지슬이 건네준 바가지에 담긴 물로 내 얼굴을 비춰봤다. 한쪽이 벌침을 맞은 듯 부어서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낯이 잘도 희어뜩헌 게 마씸!”

지슬이 주먹으로 가볍게 내 어깨를 툭 쳤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켜자 저 멀리서 노인이 다가왔다. 코끝은 여전히 벌겋지만 혀를 꼬지 않고 중얼거리듯 무어라 말했다. 자신이 대장과 잘 얘기 해놨으니 괜히 신경만 건드리지 않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알아들은 게 맞느냐고 물어보니, 지슬이 또 내 어깨를 툭 치며 이젠 자기네와 말이 잘 통한다며 눈웃음을 지었다.

노인이 돌아가고 다시 바닥에 앉아 대장은 도대체 어떤 자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지슬은 내 옆에 앉았다. 우리 머리 위에서 나부끼는 나뭇가지를 검지로 가리켰다. 그는 분명 탐라 태생은 맞다. 그러나 소문에 따르면 열 살 무렵 아버지의 고깃배를 몰래 타고 얼결에 육지까지 올라가게 된 것. 몇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그가 죽은 줄 알고 가족들은 장사를 치렀는데 그 후 딱 십 년 만에 갑옷 차림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그를 귀신이라 부르기도 했었다고. 표류하던 중 파도에 휩쓸려 닿은 어느 지방에서 산적처럼 여기저기 떠돌며 살다가 우연히 어느 군관의 눈에 띄어 수양아들이 된 것이었다. 친아들처럼 자라면서 무관으로 출세했지만, 그 후 아주 오랜 시간 치른 전쟁 여파로 수양아버지의 집은 몰락해버리고 홀로 집안을 지키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진짜 고향을 찾아 내려오게 된 것이었다. 탐라에는 먼 친척만 있을 뿐 친부모는 진작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한다던데. 훈련 때는 다소 거칠게 이끌지만 평소에는 다른 이와 말을 섞지 않지만 수하들은 조용히 챙겨주는 편이라고. 가끔 육지에서 내려온 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신경이 예민해지는 편이고, 성주 쪽 사람들하고도 마찬가지로 그리 친절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곧이어 성주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으나 지슬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웃음기가 약간 살아있던 입술은 어느새 잔뜩 오므려졌고 눈썹부터 미간까지 경련을 일으켰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정면만 노려봤다. 지슬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감자가 잔뜩 쌓인 입구인데 그곳은 낯선 자들의 행렬이 있었다. 그중 맨 앞에는 철갑을 두르고 말 아래로 내려온 자가 우리를 향해 서 있었다. 갑옷을 입은 몇몇이 그의 뒤에 바짝 붙어서 허리를 살짝 숙였고 나머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우리와 함께 훈련받았던 자들을 불러 세웠다. 철갑 두른 그자가 우리 쪽을 향해 손을 위로 들고 흔들자, 지슬은 주먹을 꽉 쥐고 눈에 핏줄까지 터뜨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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