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게 물든 지슬의 눈자위엔 눈물이 맺혔다. 갑자기 왜 그러냐는 내 말은 지슬의 귓불에도 닿지 않은 듯, 오로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저자를 향해 눈이 불타올랐다. 두 팔까지 벌리며 지슬의 앞에 다가와서 마주한 그는, 허연 앞니를 드러내며 눈웃음을 살짝 지어 보였다. 그의 곁에는 완전무장한 사내 둘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는데 그중 콧수염이 턱 아래까지 내려간 자가 입술을 이죽거리며 나를 흘겼다.

“이디서 다 봠져!”

지슬이 계속 노려보던 그는 입에서 침까지 튀겨가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끌어안으려는 시늉만 보이다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지슬은 주먹을 꽉 쥔 채 일으키면서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두덩에는 심한 경련이 일어나 있었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지켜보던 내가 도대체 당신은 뭐하는 자냐고 물었더니, 곁에 있던 자들이 눈을 반쯤 뒤집으면서 부라리는 게 아니던가. 나도 똑같이 눈을 크게 떠봤더니 콧수염이 긴 자가 허리춤에 찬 칼자루를 잡았다. 팔뚝과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갑자기 몰려와서 나도 모르게 눈동자를 아래로 살짝 내리깔았다.

“어떵 이디까지 왐신고?”

그는 지슬에게 손차양하는 시늉을 보이며 핏기가 맺힌 앞니를 드러냈다. 침을 뱉었는데 바닥엔 엄지만한 고깃덩어리가 돌멩이 틈 사이로 끼었다. 지슬은 그의 손을 다소 거칠게 걷어내며 조금 전보다 더 가늘고 예리하게 눈꼬리를 세웠다.

“뭐랜햄시?”
“영 되시민 나신티 골아야주. 벗이 이디 이신디 나가 고마이 이실 꺼라?”

그는 오른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손끝으로 지슬의 어깨를 털었다. 그러나 지슬의 어깨 위에 묻은 나뭇잎과 흙먼지는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웃는 입과 달리 그의 눈빛은 방금과 달리 미세하게 날을 세운 상태였다. 함께 있는 자들의 눈빛 또한 이와 비슷했다. 얼굴 각도는 허공을 향한 듯했으나 눈동자가 지슬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거기다가 두 사람 모두 칼자루에 손을 대고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든 적막함은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스스로 귀에 거슬릴 정도였다. 심지어 지슬이 온몸을 떠는 것까지도 마치 산 정상에서 메아리 울리듯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허튼소리 고람시냐?”

그는 지슬의 발 앞에 걸쭉한 침을 뱉었다. 그 침이 땅바닥을 향하기 전 바람의 영향으로 그의 팔목을 스쳤다. 아무렇지 않게 지슬의 손등을 끌어당겨 자신의 팔목을 닦아냈다. 그는 머쓱한 척 웃음소리를 크게 키웠다. 함께한 두 사람도 무표정한 상태에서 입만 열고 웃는 소리만 따라서 냈다. 지슬은 이를 꽉 깨물더니 그의 침이 아직 마르지 않은 주먹을 휘둘렀다. 그는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주먹은 피했으나 자신이 바닥에 뱉은 침을 밟으면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나마 곁에 있는 두 사람이 재빨리 손을 받쳐서 머리는 부딪치지 않았으나 흙먼지가 일어나서 금세 우리의 눈 앞을 가렸다.

기침이 나올 새도 없이 두 개의 발바닥이 흙먼지를 가르고 지슬에게로 달려들었고 나도 모르게 온몸으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배에 묵직함이 파고들면서 붕 뜨더니 금세 흙먼지가 얼굴과 온몸을 휘감았다. 그 사이 지슬은 세 사람의 발길질에 흙먼지 속으로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내 입에서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지만 지슬은 작은 신음도 내지 않고 그들의 발길질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저 멀리 있던 다른 사람들이 달려와서 말려도 그들의 발길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난 몸을 일으켰다가 몇 발자국 떼지 못 한 채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이 찌릿했다.

방금까지도 그들을 막으러 달려온 줄 알았던 사람들은 어느새 지슬과 나를 굵은 줄로 묶고 있었다. 신발과 하의를 털던 그는 지슬을 흘기면서 웃고 있었다. 분명 좀 전과 달리 눈과 입이 함께 말이다. 저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괜히 나를 묶던 자에게 뒷목만 얻어맞았다. 눈앞이 흐려지면서도 다리를 살짝 절룩거리는 그의 뒷모습은 확실히 보였다.

“정신 촐립써!”

귀를 따끔거려서 눈이 저절로 떠졌다. 내 옆에는 지슬이 있었고 그와 나는 줄에 묶여 있었다. 눈앞엔 그리 낯설지 않은 굵은 나무 기둥 창살이 놓였고 바닥은 축축한 짚이 깔렸다. 사방은 겨우 다리를 펼 수 있을 만큼 좁았고 창가에는 꽉 찬 달이 반쯤 걸려있었다.

여긴 어찌 왔느냐고 물어봤더니 지슬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달빛으로 비치는 지슬의 얼굴은 군데군데 핏자국이 가득했고 눈두덩과 입술은 당장에라도 터질 듯 핏줄까지 드러낼 만큼 잔뜩 부풀어있었다. 기침할 때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섞여 있었다. 나 역시도 숨을 쉬거나 말할 때 입술이 따끔거렸고 오른쪽 눈꺼풀이 돌멩이라도 들어간 듯 묵직했다. 가려웠지만 손이 뒤로 묶인 탓에 계속 깜빡거리는 게 전부였다. 배는 여전히 찌릿했고 꼬르륵 소리까지 났다. 지슬의 입에서는 한숨과 함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녁은 잘도 희여뜩 사름인게마씸.”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입가에 웃음기가 살짝 머금은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 꽉 채워줬던 숨이 입과 콧구멍으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아까 그자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지슬의 얼굴빛이 급격히 어둠에 뒤덮였다. 몸을 뒤로 젖혀 벽에 완전히 기댄 뒤 다시 한숨만 내뱉었다.

“가이는 나신디 벗이랜 허엿주. 난 혼번도 경 생각헌 적 어신디게.”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질 때쯤 지슬이 입을 열었다. 난 지슬의 옆에 기대어 겨우 다리를 펴고 있었다. 엉덩이가 쑤셨지만 딱히 일어날 수는 없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는 게 지금으로선 내가 최대치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까 그자의 행동을 보아하니 눈빛과는 달리 아주 친한 척을 했던 건 맞았다. 지슬이 말한 것처럼 진짜 벗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내용을 계속 귀 기울여서 해석해본 결과, 아까 그자는 성주의 아들이었다. 성주와 왕자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이고 서로 알게 된 건 성주 밑에서 시중을 들던 지슬의 아버지 때문이라는 것. 심부름으로 성주청에 들어가면 늘 왕자인 그와 만나게 되었고 때로는 서로 신분을 잊어버리고 벗처럼 놀기도 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고 물어보니, 지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요망지다고 했다. 몇 년 전, 성주와 함께 도성으로 올라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걸 계기로 두 사람은 더 이상 벗처럼 만나지 못 했고 나중엔 그의 누이동생이 시중드는 일을 하기 위해 성주청으로 들어간 이후는 아예 남처럼 대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슬의 마음처럼만 할 수 없었던 건, 왕자가 누이동생을 은근히 눈여겨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슬은 오라버니로서 그가 마음에 안 든 것도 있지만 현실상으로 전혀 다른 신분이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었다. 더구나 왕자는 이미 아주 어릴 적부터 탐라의 높은 관리의 여식과 혼인한 상태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지슬의 누이동생은 얼굴과 팔다리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왕자비가 왕자의 마음을 알고 투기에 눈이 멀어 은근슬쩍 자신의 시녀들로 하여금 괴롭혔던 것. 그런데도 오히려 왕자는 지슬의 누이동생을 첩으로 삼겠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이에 눈이 뒤집힌 지슬은 직접 왕자를 찾아가 주먹을 쓰다가 지금과 똑같이 하옥되고 말았다. 성주청은 물론 성내에는 왕자와 누이동생이 은밀히 정사를 나누어 회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성주는 풍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누이동생을 잡아들여 고신하고 하옥까지 했으나, 얼마 뒤 특별한 이유를 고하지 않고 돌연 지슬과 함께 풀어주기에 이르렀다. 그의 누이동생은 고신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칩거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군사들이 들이닥쳐 결박하여 성주청으로 데려가고 말았다. 이에 지슬은 바로 뒤따라갔으나 성주청은커녕 성내에도 못 들어가게 군사들이 막아냈다. 마을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성내에 진입하고 성주청까지 갔으나, 성주가 왕자와 함께 육지로 올라갔다는 것. 관리와 상인 등등 많은 사람을 대동했는데 그중 지슬의 누이동생도 포함되었다고 얘기만 돌아왔을뿐.

달포가 두 번 흐를 때쯤 성주 일행은 돌아왔지만 끝내 누이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함께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하면서 지슬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다. 왕자에게 다가가려고 했다가 오히려 군사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어 성내를 빠져나오고 말았는데, 얼마 뒤 성주 일행 중 많은 숫자가 그곳에 남아서 돌아오지 못 한다는 소문만 돌았고 그중엔 이미 숨을 거둔 이도 적지 않다고는 내용도 있었다.

밤은 깊어가지만 졸음을 몰아내고 지슬의 이야기를 귀 기울였다. 중간 중간 내가 이해한 게 맞느냐고 수차례 되물어보면서 정리해봤다. 잠깐, 성주가 직접 본토로 올라왔단 말인가. 혹시 그들이 언제 어디로 향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자, 두 해 전에 일어난 일이고 정확한 행선지는 모른다고 했다. 확실한 건, 탐라 성주는 기억하는 한 강화나 개경이나 도성 어디든 직접 온 적이 없다. 지슬이 얘기한 내용대로라면 제법 규모가 큰 것인데 도성으로 들어왔다면 절대 모를 수도 없을 것인데, 도대체 그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뭣들 햄시냐, 재게 나오라.”창가 너머로 동이 틀려고 할 때 창살 앞에 그림자 하나가 들어섰다.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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