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통폐합 위기 극복한 수산초, 아이들이 즐거운 학교로 성장

초록이 모두 빠져 버린 계절, 수산진성 안에는 아직 생기로움이 머물러 있는 듯 했다. 추위를 머금은 백동백도 내년을 기약하는 꽃망울을 자랑스럽게 언덕길 아래에 펼쳐놓고 있다. 해가 구름 위에 있어 하오의 햇살도 느끼기 어려운 교정에 백동백의 환한 꽃망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학교의 주화(主華)인 백동백 맞은편 옆길로 작은 아이들이 빨간 내용물을 담은 흰 비닐봉투를 하나씩 자기 가슴팍에 올려놓은 채로 걸어나오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깍두기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니 1,2학년 동생들이 무를 뽑고 3,4학년 친구들이 깨끗이 씻어 5,6학년 언니 오빠들이 빨갛게 버무렸단다.
그러고 보니 진성 옆 작은 우영팟에 겨울 무가 심어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 전교생이 함께 만들었다는 깍두기(좌) 수산초의 교화인 백동백(우). ⓒ우장호 기자

이 학교는 한때 학교통폐합 논란의 중심에 있던 수산초등학교다. 수산초등학교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다. 1946년 11월 15일 수산국민공립학교 인가를 받고 1946년 12월 1일 개교했다. 1950년 6월 1일 수산국민학교로 개칭했으며 1981년 3월 10일 병설유치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2002년 2월 9일 ICT활용 교육시설을 완료했다. 교훈은 ‘바르고 굳센 수산 어린이’며 교목은 소나무, 교화는 백동백이다. 유치원 1학급을 포함해 6학년 7학급으로 편성돼 있으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580번지에 있다.

과거 어느 시절엔 380여 명의 아이들로 북적이던 학교가 이촌향도의 영향으로 점점 세가 줄었다. 수산초는 2012년엔 학생수가 25명밖에 안되는 곧 사라질 것이 분명한 시골마을의 작은 학교였다. 하지만 2013년 36명, 2014년에는 47명으로 학생수가 점차 늘어 현재는 63명에 이르는 건실한 학교로 탈바꿈했다.

이 학교에 3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수산리 마을 주민들과 그 기간동안 수산초를 안과 밖에서 지켜봤던 이들에게 물음을 던진 결과 모두들 이 한 사람을 지목한다.

바로 장승련 전 수산초 교장(현 해안초 교장)이다.

▲ 장승련 전 수산초 교장(현 해안초 교장). ⓒ우장호 기자

- 당시 수산초는 교육청 내부에서 학교통폐합으로 가닥이 잡혀있었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결국 교육청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셨을텐데 어떻게 학교살리기 운동을 시작하게 됐는지요.

“기자님도 학교에 가보셨죠. 수산진성 안에다가 학교를 지은 겁니다. 성 안에 정말 아늑하게 지은거죠. 환경도 정말 아름답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교무실에서 내려다 볼 수 있고 수산초는 정말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개교를 1946년에 했어요. 오래된 역사속에 나무들도 잘 가꿔왔구요. 선배선생님들이 근무하면서 특히 정원을 담당하신 분들이 정말 내 집처럼 학교를 가꿔왔어요. 그래서 정말 아름답죠”

아름답다는 말만으론 설명이 부족했는지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아름다운 환경에서 근무했기에 수산초에 있는 동안 좋은 시도 많이 쓸 수 있었습니다. 환경은 물리적인 것이지만 그 물리적인 것이 아이들에게 정신적인 것으로 까지 작용하는 것을 배웠어요. 동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비탈길 나무 그늘에서 아이들이 숨박꼭질도 하고..아이들의 천지난만한 웃음들이 전부 생각납니다. 수산리 마을사람들이 학교를 얼마나 아끼는 지 몰라요. 수산마을이 곧 학교고 학교가 곧 수산마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학교가 꼭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더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임 후 5월 8일 경로잔치 언제합니까 물어보니 7일도 하고 8일도 합디다.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의논해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우리 어린이들의 갈고 닦은 재능을 보여주자, 해서 한거죠. 부임 해부터 경로잔치때 무용, 악기연주, 그 동안 배웠던 것들을 보여드리니까 어르신들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어요. 그런 행사를 치르다 보니 마을에서도 학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더 커진 것 같았습니다. 안그래도 학교를 더 없이 소중하게 여기셨던 분들이 그 소중함을 더 알게 된거죠”
 

장승련 교장은 학교 존폐 위기 속에서도 성산읍에 중국관광객이 많이 찾는 것에 착안해 중국어 교육을 시작하는 등 학원이나 문화기관이 없는 마을을 위해 다양한 교육기회를 살리려는 노력을 했다.

모둠북 연주, 글짓기, 과학 등 각종 대회에서 학생들의 수상이 이어졌고 입소문이 퍼져 도외에서 수산초에 전학오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변화는 시작됐다.

바로 어제의 기억처럼 긴호흡으로 말을 이어가던 그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그런데 상황은 통폐합이었던 거에요. 교육청에서 지원을 하고 인센티브를 주면서 여기를 문화시설로 활용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이 있었어요. 그것도 좋지만 사실 농촌에서 문화생활을 할 시간이 많이는 없지 않나 싶었어요. 아침시간에는 밭에 가시고 밤 늦게 까지 일하시니까, 또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구요. 또 하나는 마을에서는 마을대로 걱정하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있어야 마을이 생성•발전되는데 우리 아이들이 없으면 마을도 없어진다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우리 마을 리장님도 계시고 해서, 왜 우리가 가면 인사하잖아요. 교장에게 거는 기대가 크지 않습니까. 그 분들 말씀이 ‘우리 마을이 이런 형편인데 교육청에서는 자꾸 문화시설로 활용하자고 하고 돈을 몇 십억 준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반갑지 않다’며‘학교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그렇게 얘기 하시기에 그러면 나도 이제 그런 아름다운 환경을 놓칠 수가 없어서 학교를 살려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학교를 살려야겠다는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에는 다시 힘이 들어간다.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함께 학교를 살리는 쪽으로 행보를 바꾸기로 했어요. 그게 또 공감대가 형성이 됐고, 그때부터 동네를 이용하기로 하고 마침 수산리가 정보화 마을이라 해서 인터넷으로 생산물도 판매하고 그걸 이용해서 학교 살리기 운동을 하자고 해서 동네를 중심으로 해서 모금을 하기로 한거죠. 그 모금을 한 것으로 집을 짓자 이렇게 합의하니 나중에 지자체에서도 5대 5 투자를 하겠다고 그래서 그렇게 집을 짓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이제 마을과 학교에서 함께 하게 되니까 그게 알려지면서 돈도 모이게 되고 사람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죠”

학교를 멸하러 저 저승사자들이 오는거 보라..학교 데리러 저 저승사자들이 온다..
 
장승련 교장은 당시 수산초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도 소개했다.

“여름이 다가오던 때인가 교육청에서 사람들이 온답니다 해서 우리가 나갔어요. 마을 어르신들도 오시도록 했죠. 그래서 학교 교정 나무 그늘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날 그분들이(교육청) 퇴근해서 오셨는데 퇴근해서 이 곳에 오면 1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면 날이 어둑어둑 해지는 거죠. 어스름해져갈때요. 그 분들이 한 열 분이 됐는데 양복을 입고서 걸어오시는데 날이 어두워서 까맣게 보여요. 멀리서 그 분들이 오는 모습을 보고 한 학부님이(총동문회장)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학교를 멸하러 저 저승사자들이 오는거 보라..학교 데리러 저 저승사자들이 온다.. 나는 그 표현을 듣고 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라고 말하는 장 교장의 눈은 눈물로 빨갛게 충혈 돼 있다.

▲ 수산초등학교 전경. ⓒ우장호 기자

학교가 있음으로 인해서 주민이 늘어나고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이 생기는 것...

그랬다. 작은 학교 살리기가 중요하고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해당 지역과의 상생 관계에 있었다. 학교는 학생이 필요하고 마을 입장에서는 학교가 있음으로 인해서 주민이 늘어나고 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이 생기는 것이다.

당시 교육위원으로 있던 이석문 교육감도 “학교를 살려달라는 것은 우리 마을을 살려달라는 얘기와 다름없다”고 말하며 수산초 살리기에 적극 동참했다. 후에 교육감이 된 후 공교육 정상화와 작은 학교 살리기 대책의 일환으로 내놓은 게 제주형 혁신학교 ‘다혼디 배움학교’다.

제주형 혁신학교를 학생 수 감소 등으로 통폐합 위기에 처한 읍면지역 초등학교에 먼저 도입해 작은 학교를 살리고 안정적 기반 속에서 공교육을 서서히 변화시키겠다는 생각도 교육위원시절 수산초와 함께하며 구상했을 터였다.

보호를 받던 대상에서 이제는 제주교육을 이끄는 성공모델로서 도전장을 내밀게 되는 수산초의 미래가 주목되는 이유다.

적어도 두 달 전 수산초의 장밋빛 청사진은 이러했다.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