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생각이나 했을까, 그의 그림자와 목소리에 내 눈이 번뜩일 줄은. 문 앞에서 요지부동하지 않던 군사들은 날카롭게 세운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금방 빗장을 열었다. 지슬과 나의 몸을 꽉 묶었던 줄도 풀어주면서 친히 부축으로 일으켜 세워주기까지. 지슬과 함께 옥사를 나오자 그가 뒷짐을 지고 다가왔다.

“괜춘허냐?”

검게 물들어버린 그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다. 윗입술은 부르터서 핏기도 맺혀있었다. 호흡 역시 거칠었지만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동안 내게 칼을 겨눌 때와 달리 눈꼬리가 살포시 내려가 있기까지. 괜찮으냐는 그 말에 새삼 내 코끝은 달아올랐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려고 했다. 그것도 잠시, 얼른 마당에 모이라고 전하면서 뒤돌아섰다. 갑자기 이게 무슨 연유냐고 물어도 그저 앞장서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는 지슬을 부축하며 서둘러 뒤따랐다.
마당에는 우리와 훈련했던 장정들이 무장한 상태로 대열을 만들었다. 그들 앞으로 갑옷 차림의 노인이 칼을 높이 세워 들고 한창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었다. 이에 장정들은 하늘에 흠집이라도 낼 기세로 굵직하고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지슬과 나는 대열의 오른쪽 맨 뒤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를 데리고 온 대장은 그사이 노인의 옆에 자리 잡고 서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노인이 칼을 내려놓자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준비 되엄시냐? 우리가 지둘려온 그날이 왐져!”

그의 말에 장정들은 모두 다시금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슬은 자신의 갈비뼈를 붙잡으면서도 다른 이들처럼 목소리가 찢어지도록 악을 써댔다. 잠시 뒤 노인의 호령에 대장이 먼저 앞장서서 달렸고 장정들이 뒤따라 발을 재촉했다. 지슬은 기침을 연신 내뱉으면서도 저들과 속도를 맞추려 했고 나 역시도 그들처럼 악다구니 그 비슷한 걸 내지르며 발을 맞췄다. 입구에 문이 열렸고 대장이 구령하자 나머지는 기합을 넣으며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들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숨은 턱밑까지 차올라서 목구멍을 긁어 댔다.
군영 바깥으로 나오자 달빛마저도 뒤덮어버릴 어둠이 내리깔렸다. 대장과 그 뒤 두 사람이 들고 있는 횃불 주변 외에 거의 보이는 게 없었다. 그나마 간간이 눈빛과 기침이 섞인 숨소리가 들려오는 게 이곳을 내가 지나왔다는 걸, 퀴퀴한 냄새와 함께 되짚어볼 뿐이었다. 굳게 닫힌 성문이 열리고 성벽 위에 경계를 서는 군사들의 환호를 뒤로한 채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도대체 우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발길이 멈춘 곳은 군함 여러 척이 줄이어 정박해있는 작은 포구였다. 우리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장정 무리가 여럿 모여들었다. 그중 우리 대열은 정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맞은편에 나무와 돌로 대충 세운 사열대가 있었는데, 그곳엔 아까까지만 해도 지슬과 나를 옥에 가둔 왕자와 그 무리가 있었고 그들보다 더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바로 그자였다, 성주. 콧방귀를 연신 내뿜는 콧구멍이 어둠 속에서도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난 게 확실했다. 허리춤에 찬 칼보다 더 예리하게 세운 눈초리로 모인 사람들을 두루두루 살펴보던 그. 분명 나와 눈이 마주친 듯했으나 달빛과 횃불이 나까지 완전히 비추진 못한 탓에 특별히 그의 시선이 내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고려는 이미 망국이다. 그러나 대원제국은 우리를 고려보다 먼저 품기로 하였다. 이는 짐의 덕이 아니겠느냐, 탐라의 아들들이여! 우리의 손으로 삼별초 역적들을 고려군보다 먼저 몰아내자, 선조가 이뤄놓은 옛 탐라의 땅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느냐, 황제께서 짐과 친히 약조하였다, 모든 것은 그대들의 손에 있도다. 탐라에 드디어 기회가 왔느니라. 준비되었는가!”

성주는 칼을 치들며 숨소리만 가득한 어둠 속 정적을 굵직한 목소리로 뒤흔들었다. 왕자가 옆에서 두 팔을 벌려 “만세!”하고 외치자 그 주위를 지키던 자들이 따라했고, 대열 맨 앞자리에 서 있던 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우리의 대장 역시 노인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오히려 성주보다 더 큰 목소리로. 곧이어 장정들의 목소리도 합세하였는데, 양쪽으로 내 시야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도 소리가 올라와서 하늘을 울렸다.

슬도 역시 두 팔을 번쩍 들고 있었으나 입은 꾹 다물었다.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면서도 시선은 왕자를 향해있었다. 그 눈빛만큼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보다 더 강렬했다. 나도 지슬과 마찬가지로 두 팔을 들었고 입만 벌리는 시늉만 했다. 하필 뒤돌아서 팔을 더 세차게 흔드는 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다른 이들처럼 목소리를 대충 내봤다. 그런데 괜히 콧물을 삼켰던 것이 사레가 되어 목으로 넘어오고 말았다. 누런 액체를 완전히 뱉어낼 때까지 지슬보다 더 심하게 기침을 토해냈다. 얼굴은 달아올라서 땀으로 범벅이 될 지경이었고.

이제 좀 진정이 되려나 싶을 때, 우리는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성주는 사열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장정들에게 “승리하라!”고 소리쳤다. 거의 바로 옆으로 지나치는 내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다행인 건지 알아보진 못 했다. 다만 왕자와 지슬과 나를 발견하곤 무어라고 말했으나 배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서 단 한 글자도 들리지 않았다. 지슬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왕자를 본체만체하며 나와 함께 배에 올라 갑판 오른편 정중앙에 자리 잡았다. 함께 올라온 이들 중 몸집이 다부지거나 덩치가 있는 자들은 대장이 따로 불러내어 배 내부에 내려보냈다. 성주 곁에 있던 자가 깃발을 올리자, 배는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포구에는 성주와 왕자, 그와 붙어 다니는 수십 명이 장정들만이 자리를 지켰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자, 배에 올라탄 자들은 모두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바다 물살을 뒤집을 기세로 목소리를 내질렀다.

배는 고려 수군이 사용하는 누전선과 거의 흡사했다. 다만 크기가 높이와 전체적인 면적이 작은 편이었다. 어두워서 전체를 다 살펴볼 수 없었으나 확실한 건, 갑판 곳곳에 산발적으로 균열이 났다는 것. 바로 몇 발자국 앞에는 작지만 구멍이 나 있어서 아래에 노를 젓는 장정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포구에서 얼마 멀어지지 않았는데 배가 물살에 심히 흔들렸다. 탐라로 내려올 때 탔던 배에서처럼 속이 매슥거리기 시작했다. 당장 뭐라도 뱉어내고 싶었지만 배에서는 그저 요란한 소리만 날 뿐 신물이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것 외에 도로 넘어오는 건 없었다. 두 손으로 난간을 꽉 붙잡고 심호흡으로 꽉 조이는 두통과 오장육부를 휘젓고 다니는 매슥거림에 버티듯 맞섰다. 지슬 역시 난간에 온몸을 바짝 붙인 채 기침만 연신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도 거의 비슷비슷하게 겨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노인은 배에 오르자마자 배 가운데 부분에 설치된 선실로 들어갔고, 대장은 뱃머리에 있었다. 좌우로 뒤집힐 듯 흔들렸고 심지어 비바람까지 불기 시작했지만 대장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앞만 보고 서 있었다.

성주가 말 한대로라면 우리는 분명 탐라를 벗어나 내륙으로 간다는 게 아닌가. 어쩌면 이대로 무사히 내륙 어디든 당도만 할 수 있다면야 모든 사실을 알릴 기회일 것이다. 배와 하늘, 바다의 상태를 보아하니 내륙은커녕 지금 떠 있는 그 자체로만 가슴을 쓸어내릴 법했다. 비바람 탓인지 포구는 금세 모습을 감췄고 배들도 횃불을 제대로 올려놓지 못 하였다. 사방은 어둠이 깔렸고 간간이 바람 소리와 함께 다른 비명이 함께 실려 왔다. 과연 이대로 항해가 가능하단 말인가, 탐라로 내려오면서 기절해 있느라 기절은 하나도 없지만 탐라에서 가장 가까운 본국의 고을은 보통 거리가 아닌 줄 알고 있다. 이대로 나까지도 바닷속으로 사라진다면 여기서 보았던 것들은 도대체 누가 알린단 말인가. 어느새 두통은 사라졌지만 축축하게 젖어버린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더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난간을 꽉 붙들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더니 온몸은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지슬이 나를 향해 무어라 외쳤지만 하나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래서 치는 북소리가 진동으로만 겨우 느껴질 뿐이었다. 숨도 겨우 내뱉고 있을 때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다. 고개를 들어볼 새도 없이 갑자기 뺨이 얼얼해졌다. 거의 감겼던 눈을 다시 크게 떴고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신 촐리라! 지금이 진짜 시작이난.”

대장이 내 귀에다 대고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넣었다. 다시 한 번 더 그의 손바닥으로 나머지 뺨을 얼얼하게 한 뒤에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사이 지슬은 한 손으로 내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중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난 내 눈을 잠시 의심하고 말았다. 분명 포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 더 넓게 퍼진 밝은 불빛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쪽은 분명 우리가 떠나왔던 탐라였고 배는 어느덧 돛을 올리고 방향을 돌리는 중이었다. 북소리는 잠잠해졌지만 배는 오히려 더 빠르게 불빛이 있는 쪽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지슬은 희미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채 난간에 바짝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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