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이 활시위를 당기자 내 손끝에 경련이 올라왔다. 그사이 뱃머리를 돌린 배는 물살을 거칠고 빠르게 헤쳐나갔다. 성을 뒤덮는 불빛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가 활시위를 놓았을 때 불이 붙은 화살은 어둠을 깨뜨리고 나아갔다. 곧바로 우리 배에서 북소리가 적막함을 뒤흔들었고, 양쪽에서 함께 나아가는 다른 배들도 금방 동참했다.

점점 거칠어지는 물결에 배는 좌우로 거의 뒤집힐 듯 요동했고 난간에 몸을 매달리듯 바짝 붙였다. 지슬은 나와 비슷한 자세였지만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눈에 힘을 준 채 자신의 자리를 꼿꼿하게 지켰다. 활을 내려놓은 그는 어느새 칼자루를 쥐고 뱃머리에 바짝 붙어있었다.

성벽 바로 앞 포구와 가까워질수록 북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어느덧 파도까지 잠재웠다. 성벽 위 군사들은 불을 더 밝히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슬에게 지금 우리가 무얼 하는 건지 정확히 얘기해달라고 했지만 북소리가 너무 큰 탓인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 했다.

“우리를 막으민 누게든 몬딱 모사불어야 헌다이. 알암시냐!”포구에 거의 맞닿을 때쯤 그가 사람들의 함성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배가 완전히 정박하자마자 노인이 호령하고 그가 꺼내든 칼끝에 따라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뛰어내렸다. 지슬이 뛰어내리자마자 나도 뒤따라가려다가 그만 배 난간에 발이 걸려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일어난 흙먼지가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마와 코끝에 시큰거림이 다 올라오지 않았는데 거의 맨 나중에 내린 노인이 직접 손으로 일으켜 세웠다.

“정신 촐리라.”
 

귓속말만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무리 속에 합류하였다. 배는 물결을 따라 좌우로 흔들거렸고 바람이 점점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난 얼굴에 묻은 흙을 얼른 털어내고 달려나갔다.

성문 앞에는 기마부대가 넓게 진을 치고 있었다. 먼저 앞서 간 사람들이 그들과 이미 대치한 상태였고 훈련대장이 노인보다 더 앞장 서 있었다. 모두 무기를 꺼내 들었기에 나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가 식은땀이 금세 얼굴과 뒷목까지 덮어버렸다. 칼은 칼인데 훈련할 때 사용했던 목검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제대로 된 진검이건만. 이미 뽑아든 칼, 도로 넣으려다가 괜히 내 앞에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칼을 슬쩍 아래로 내려놓고 괜히 목에 힘을 주고 앞만 쳐다보았다.

“무사 이디까정 왐신고!”

성문 앞을 지키는 군사 중 한 명이 말과 함께 앞으로 몇 발자국 나왔다. 나머지는 칼을 뽑았고 성벽 위에 있는 군사들은 활시위를 바짝 당기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있는 궁수들도 마찬가지로 활 꺼내 든 상태였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더니 성벽과 망대에 설치된 횃불이 요동치더니 그중 서너 개는 완전히 그 힘을 잃기도 했다.

“우리는 성주와 그 패당을 사로잡으러 왔노라. 길을 내어라.”

대장이 한 발자국 나아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말에 올라탄 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술렁였다. 성루 한가운데에 덩치가 제법 큰 사내가 나타나더니 칼을 뽑아들었다. 대장과 마주 섰던 군사는 진을 친 선봉대 뒤에 자리를 잡았다. 성루에 선 사내는 스스로 수문장이라 소개하며 당장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탐라 말투여서 완전히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대략 그렇게 알아들었다. 지슬은 맨 앞줄에 서서 뒤통수만 보여주는 터라 당장 누구한테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내 양옆에 있는 자들은 아예 초면도 있고 함께 훈련한 이들도 있었지만 딱히 나와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이제라도 말을 걸어보려 해도 모두 하나같이 당장 누구라도 잡아먹을 듯 눈에 힘주고 씩씩거리고 있으니 눈길조차 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디서 영허기 실프다, 재게 비켜라. 아님 혼디 가젠?”대장의 뒤에 서 있던 노인이 앞으로 나아갔다. 단지 몇 걸음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그들을 향했다. 칼과 도끼를 겨누던 선봉대 코앞으로 다가가면서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수문장은 성루 난간에 매달리듯 붙어서 방금과 달리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중얼거리듯 노인을 향해 말했다. 그럴수록 노인은 점점 앞으로 더 나아갔고 선봉대는 그저 무기를 겨누고만 있을 뿐 노인을 완강히 막아내지 않고 조금씩 물러났다. 대장과 마주했던 군사가 손짓하자 성문 앞을 지키던 군사들이 모두 양옆으로 물러났다. 성문 앞에 선 노인이 직접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하자 수문장은 제자리서 계속 맴돌며 발만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뭣햄시냐!”

노인이 호통하자 성루와 성벽 위를 지키던 군사들은 각자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서로 눈치를 살펴봤다. 양옆으로 비켜난 군사들도 각자 무기를 다 내려놓고 시선을 허공에 내다 버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질수록 수문장은 성루 위에서 혼자 부산하게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대장의 신호에 따라 우리가 전진하기 시작하자 수문장은 무기도 내려놓고 손바닥을 펼쳤다. 대장은 전진하면서 양옆으로 비켜난 군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와 마주했던 군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에서 내려오자 나머지는 일제히 무기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내려놓았다. 우리 쪽 사람들 몇몇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그들이 내려놓은 무기를 손수 거둬들였다. 그사이 노인은 문을 발로 걷어차며 고함까지 내지르는 중이었다.

결국 성루에서 수문장은 자취를 감췄고 대장이 노인의 뒤에 다가갔을 때 성문이 틈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대장의 신호를 따라 우리는 모두 함성과 함께 성문을 통과했다. 성문 주변에는 민가가 여럿 보였는데 우리의 발소리가 커지자 모두 불을 껐다. 어둠은 점점 퍼져가더니 어느새 성안의 가운데쯤 가장 밝은 그곳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함께 내려온 자들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성주청. 배에 오르기 전 우리를 향해 기세 높게 외치던 성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술이 메말라가면서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멈추지 않고 오히려 발을 재촉하여 지슬의 옆으로 다가갔다. 땀으로 얼굴이 푹 젖고 호흡에 쉰 목소리까지 섞어가며 거칠게 내쉬었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니 초점이 실종된 눈동자로 흘기면서 걸쭉한 붉은 침을 머금은 앞니를 드러내며 한껏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내 얼굴이 점점 굳어 갔고 왕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껏 속도를 높일 것만 같았던 대장은 성주청을 바로 코앞에 두고 걸음이 느려졌다. 이에 우리도 함께 발소리를 점점 죽이면서 성주청 정문을 살펴보았다. 성벽만큼은 아니지만 돌로 담을 장정 서너 명 정도 붙여 세운 높이에, 쇠로 만든 듯한 문은 담보다 약간 낮은 높이로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게 닫혀있었다. 주변 민가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온통 어둠에 깔렸다. 풀벌레 울음 빼고는 내가 천천히 내뱉는 숨소리조차 소음이 되어 귀를 긁어댔다.

대장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혼자서 대문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의 발이 흙을 쓸어낼 때마다 내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었다. 입술과 혀까지 말라서 숨을 내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조용히 심호흡하고 있을 때, 노인이 무기를 집어넣고 대문으로 다가가 그의 옆에 자리 잡고 섰다. 대장과 잠시 귓속말을 나누더니 지슬과 내게 손짓했다. 그걸 똑같이 따라했더니 지슬이 슬쩍 째려보면서 뒷덜미를 붙잡고 일으켰다. 노인의 곁으로 다가갔는데 앞만 쳐다봤던 지슬과 달리 난 오른쪽 돌담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돌담 너머에 낯선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턱 막혀서 헛기침만 겨우 터져 나왔다. 대문에 귀를 바짝 대면서 노인과 대장을 향해 입을 열었으나 두 사람 모두 노려볼 뿐이었다. 대문에 붙인 귓속으로 들려오는 건, 흙이 바람에 휩쓸리는 것 같았으나 당장 내 손끝을 스치는 바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란 생각이 들기도 전혀 등 뒤에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분명 깜깜했던 주변 민가가 갑자기 밝아지더니 사방에서 불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대열은 금세 흐트러졌고 쇠가 부딪치는 소리까지 합쳐지면서 비명이 급격하게 퍼져나갔다. 불화살이 날아든 쪽에서는 성주 곁을 지켰던 군사들이 완전 무장한 상태로 달려들어 칼과 창, 도끼를 휘둘렀고 바닥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대장이 얼른 칼을 빼 들고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슬도 그를 뒤따랐으나 오른쪽 다리가 절뚝거렸다. 바로 머리 위로 화살이 스쳤고 도끼를 든 군사가 성난 짐승처럼 달려드는 중이었다. 목검을 더 꽉 쥐고 뛰어들려고 하자, 노인이 내 머리채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영문을 물어볼 새도 없이 대문은 진동과 함께 서서히 열렸고 노인과 함께 대문 뒤에 바짝 몸을 붙였다. 머리채를 끌어당겼던 그 손으로 내 입을 막으며 눈에 힘주어 쳐다보았다.

점점 더 커지는 비명이 귓가를 날카롭게 맴돌았지만 곁눈으로 마주한 노인의 눈동자를 도저히 회피할 수 없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지만 입술을 꽉 깨문 노인, 도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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