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이 내 귓속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분명 노인의 목소리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명이 내 귓속에서 좀처럼 빠져나가질 않았다. 성주는 여전히 내 앞에 마주 앉아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정녕 모르는 줄 안단 말이지. 네놈도 마찬가지고.”

성주는 허리춤에서 단칼을 꺼냈다. 목에 날을 드리우며 미소를 다시 드러냈다. 등골에 땀방울이 서리면서 온몸은 떨려왔다.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보았던 그 모든 것을 성주가 알고 있었단 말인가. 굳이 나를 살려두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찌 보면 내가 딱 한 번 속긴 속았군. 네놈이 그렇게 솔직할 줄은 몰랐느니라.”

성주는 코웃음과 함께 칼을 다시 제자리에 거두었다. 두 손으로 직접 나를 일으키더니 이곳저곳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은 네놈의 사지를 찢었느니라. 하지만 과인은 그리 덕이 부족하지 않지.”

성주는 느린 걸음으로 내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중얼거렸다. 말투와 걸음걸이 전체적인 풍채를 전하와 똑같이 따라하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필, 목에 걸렸던 침이 함께 튀어나오면서 성주의 얼굴을 스치고 말았다. 먼발치에서 우리를 향해 서 있던 그림자들이 움직였지만, 성주가 손을 흔들며 제지했다.

“지금 뭐가 그리 우스운 것이냐?”

그가 물었지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따지고 보자면 오히려 지금까지 나의 행적이 더 우스운 게 아닌가. 영문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무리에 끼어들었다가 지금 성주와 다시 만나기까지. 분명 그가 나와 함께 왔던 모든 이를 해친 게 맞고, 어쩌면 나도 그의 손에 어찌 될 것인지도 모를 일이건만. 지금 냉랭한 공기를 호흡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차분해졌다. 난 나라의 중요한 책무를 맡아서 내려온 관리가 아니던가, 지금쯤 나의 소식을 기다릴지도 모를 부인이 떠오르는 건 정녕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여기까지 몰리게 한 건 바로 성주가 아니던가. 입가에 웃음기를 얼른 거두고 힘이 들어간 눈으로 성주와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도 이미 눈동자에 핏줄이 굵게 피어난 상태였다.

“지금 정녕 나를 능멸하는 게냐?”

나지막하게 물었지만 오히려 칼을 목에 들이밀었을 때보다 팔다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그럼에도 눈은 오히려 힘이 더 들어갔다. 내 신분을 확실히 알았느냐고 되물었다. 돌아오는 건 왼뺨에 뜨거운 기운이었다. 다시 물으려고 할 땐 오른뺨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 목에 칼을 꽂으라고 소리쳤더니 그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여태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구나. 보기보다 기운이 만만치 않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앞으로 다시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어보였다. 멱살이 그의 손에 잡혔는데 오히려 팔다리의 떨림이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난 다시 눈에 힘을 더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동안은 왕이라도 된 듯 군림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라고.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을 해하는 건 분명 마땅한 벌이 떨어질 것이니 지금이라도 깨달으라 하였다. 저 멀리 있던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지만 난 멈출 수가 없었다.

“무릎 꿇어라!”

성주의 팔을 걷어내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림자들이 움직임이 갑자기 분주해졌고 성주는 손짓으로 제지했지만 얼굴은 미묘하게 넋이 빠져있었다. 당장 잘못을 구하고 무고하게 잡은 자들의 신변 안전까지 보장한다면, 개경으로 돌아가서 선처를 대신 구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내놓았다. 몽골과 밀약을 계획했던 것까지 눈감아줄 의향도 있는 것도 함께 밝혔다.

“아이고,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성주가 선뜻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절까지 하는 게 아닌가. 나야 말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토록 순순히 따라줄 줄이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뒤로 몸을 누이더니 자지러지게 박장대소하였다. 한참 웃음소리로 저 너머에서 울리는 비명을 잠재우던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하를 불러냈다. 명을 받은 신하는 같이 서 있던 몇몇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옷매무시를 다듬더니 내게 다시 다가와서 멱살을 붙잡았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선뜻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도 말없이 그저 나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목에 땀이 차려고 할 때쯤, 조금 전 사라졌던 신하들이 나타났다. 그들뿐만 아니라 온몸이 축 처진 상태로 끌려오는 두 사람도 함께였다. 가까워지면서 드러난 얼굴은 바로 지슬과 노인이었다. 지슬은 처음 끌려갔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으나 노인의 몰골은 심상치 않았다. 봉두난발이 된 머리카락부터 피떡으로 범벅이었다. 퍼렇게 부은 눈은 도무지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입술은 다 터져서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옷은 갈가리 찢어져서 그 틈새로 피와 떨어져 나간 살점이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었다. 그저 숨만 드문드문 내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오히려 눈을 멀뚱히 뜬 지슬이 멀쩡해 보일 정도였다.

“들어라.”

성주는 나를 밀어내며 멱살을 놓았다.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칼자루를 잡자마자 그의 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선뜻 손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칼날은 달을 머금고 예리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칼이 굶주렸다지 않느냐, 어서 베어라.”

성주는 내 등을 떠밀며 두 사람 앞에 마주 서게 했다. 왜 이러냐고 묻자,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했다. 둘 중 하나를 내 손으로 베어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것. 만약 누구도 베지 않으면 셋 다 직접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를 올려다보던 지슬이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 노인은 여전히 신음과 함께 호흡만 겨우 내뱉는 중이었다. 칼자루를 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큰소리라도 내야 하건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 번 더 재촉하던 성주는 내게서 칼을 빼앗더니 노인의 오른손 엄지를 바로 내리꽂았다. 피에 물들어버린 칼을 다시 건네준 성주는 눈짓으로 재촉했다. 차라리 내 목을 그어버리라고 하자, 성주는 신하의 허리춤에 있던 칼로 지슬을 향해 겨누었다. 잠시 머뭇거릴 선택도 없다며 칼을 높이 들더니 곧바로 휘둘렀다. 칼끝이 바닥에 깊이 꽂혔고 지슬은 그 자리서 쓰러졌다. 난 몸을 떨면서 그걸 지켜보기만 했다.

“과인의 아량은 여기까지니라.”

땅에 꽂힌 칼은 핏물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 지슬은 뒤로 쓰러졌을 뿐 얼굴과 몸 어디에도 칼이 스쳐 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칼을 치든 성주는 지슬과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턱짓하였다. 내가 쥔 칼끝은 이미 노인에게 향했으나 다시 몸을 일으킨 지슬이 고개를 계속 내저었다. 이대로 멈춰있을 순 없었다. 한껏 웃음을 터뜨리던 성주의 눈빛에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던 순간, 난 노인 쪽으로 달려들었다. 지슬이 쉰 목소리로 괴성을 내질렀지만 이미 내 몸은 움직인 상태였다.

“지,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목소리를 더 키운 쪽은 성주였다. 내가 쥔 칼은 노인을 붙들고 있는 신하 중 한 명의 목에 바짝 붙인 상태였다. 물론 그가 반사적으로 칼을 꺼내어 옆구리를 찔렀지만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이 떨고 있었다. 성주와 달리 그는 목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웅얼거리며 나와 눈을 마주 볼 뿐이었다. 성주는 당장 거두지 않으면 칼을 내리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젠 당신도 택해야 하오, 수하의 목숨을 거두고 싶다면!”

기침과 함께 성주를 향해 소리쳤다. 함께 있던 신하들의 얼굴은 내 쪽으로 향했지만 눈동자는 성주에게 향했다. 머뭇거릴 선택, 나 역시도 줄 생각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칼을 살짝 더 밀어 넣었다. 괴성 같은 신음을 그가 터뜨리자, 함께 있던 신하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어 내게 겨누었다.

“감히 내게 선택을 강요하느냐, 온몸이 다 찢길 것이다!”

성주는 더 굵고 큰 목소리로 외쳤으나 끝에는 미묘하게 떨림을 섞어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허리에 겨눴던 칼을 떨어뜨리며 발버둥 치던 그는 흰자위를 드러내며 제자리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목에 살짝 파고 들어간 칼을 놓치지 않고 억지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만, 그만, 그만!”

결국, 성주는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를 겨누던 무기들도 모두 물러났다. 내가 칼을 겨눈 그는 다른 이에게 밀어버렸다. 지슬과 노인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미소를 유지할 수 없는 건, 이제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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