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그들의 손에서 풀려난 지슬은 노인을 붙들고 잘 버티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일어설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칼을 들었던 팔에 경련으로 감돌았다. 악다구니를 쓰며 움직이려 할수록 목구멍만 따가울 뿐이었다.

“그대의 투지가 과인을 울리는구나!”

성주는 코웃음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곁에 있는 자들의 조소도 내 귓속을 은근하게 파고들었다. 지슬은 다시 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내 옆으로 붙이며 얼른 일어나라고 속삭였다. 다시 이를 꽉 깨물었으나 딱 그뿐이었다. 어느새 다시 내 주변을 둘러싼 성주의 부하들만 멀뚱멀뚱하게 올려다볼 뿐이었다.

성주는 나를 흘겨보더니 뒤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곧바로 군사들은 나부터 포박하기 시작했다. 지슬은 몸부림으로 맞서는 듯했으나 금세 나와 같은 모습이 되고 말았다. 체온이 거의 식어가던 노인이 먼저 끌려갔고 나와 지슬이 뒤따랐다. 어둠 속을 벗어나자 눈앞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젖은 지푸라기 바닥이 보였다. 줄이 묶인 채로 엉덩이를 걷어채면서 그 안에 들어갔다. 일어설 시도도 않고 젖은 지푸라기에 몸을 누이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질 수 없었던 건, 눈을 내리쬐는 햇볕의 기운부터였지만 내 귀를 긁어댄 목소리들이 더 결정적이었다. 막상 눈앞엔 햇볕보다는 문앞을 지키는 그림자들이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슬은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대앉아 있었고 우리 말고는 이 방에 갇힌 다른 자들은 없었다. 지슬을 향해 한마디 내뱉으려고 할 때마다 이미 타 들어간 입술과 목구멍 때문에 통증이 올라와서 머리를 짓눌렀다. 깔고 앉은 지푸라기를 움켜쥐고 신음을 내뱉자 갑자기 문이 열렸다. 군사 세 명이 다가오더니 별다른 말도 없이 밖으로 끌어냈다.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눈까지 천으로 가렸다. 끌려가면서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내 팔다리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갈에 발등이 쓰라리면서 어지럼증만 진하게 돋아났을 뿐.

계단 몇 개를 오르더니 보드라운 천이 발등을 매만졌다. 뭉툭하게 튀어나온 턱에 무릎이 세게 부닥친 다음에야 멈추었다. 가렸던 눈만 풀린 채 바닥에 옆으로 누웠다. 당장 눈앞이 흐려서 누가 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순 없었지만 가래 섞인 웃음에 귀가 쫑긋했다. 서둘러 눈을 깜빡거리자 흐렸던 앞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네놈이 사서 고생하구려!”

코앞에 바로 성주, 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가 눈알을 뒤집자 콧방귀와 함께 방금 앉아있었던 탁자로 돌아갔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술과 함께 고기를 한 점 떼어 입에 넣었다. 몇 번 씹다가 삼키지 않고 내 쪽을 향해 바닥에 뱉어내기까지 했다. 내 시선은 절로 바닥을 향했고 의지와 상관없이 마른침까지 삼켰다.

“먹고 싶으면 대답해보아라, 내가 좀 더 뱉어주겠네!”

그는 고기를 한 점 더 씹었다. 곁에서 술을 따르던 시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술병을 빼앗아서 통째로 한 모금 들이켜더니 시녀의 몸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무릎에서 밀어내더니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소리 내지 않고 다시 일어나려던 시녀는 성주의 발길질에 가슴팍을 걷어 채이며 내 옆으로 넘어졌다. 졸지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살려주옵소서.”

기침과 함께 시녀의 입에서 나온 말투를 듣고 내 귀가 저절로 바짝 세워졌다. 움푹 팬 둥근 눈은 어느새 시뻘게지더니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콧물도 삼키면서 웅얼거리듯 연신 살려달라는 목소리에 귀를 다시 기울였는데 확실했다. 최소한 탐라, 이곳 사람의 말투가 아님을. 괜찮은지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여전히 재갈을 문 내 입으로는 어떤 말도 뱉어낼 수 없었다. 여인의 눈물이 바닥을 적시려고 하자, 성주가 빈 술잔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파편이 사방에 흩어지면서 내 얼굴과 여인의 얼굴을 할퀴었고, 바닥은 금세 피와 눈물이 섞여 더 빠르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찌 과인을 노엽게 하느냐!”

성주는 혀가 꼬인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연신 술병을 들이켜더니 갑자기 탁자를 걷어차는 게 아니던가. 나와 마주 보던 여인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모두 한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사이 성주는 내 머리맡까지 다가오더니 뽑아 든 칼을 여인의 목에 겨누었다.

“과인은 관대하다, 네놈을 당장 베지 않고 또 기회를 줄 생각이니!”

말끝에 힘을 한껏 실은 그는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군사들이 다가오더니 나를 일으켜 세우는 듯하다가 무릎을 꿇게 하였다. 그중 하나가 내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히더니 다른 이가 목을 줄로 감아버리는 게 아니던가. 딱 숨만 겨우 내쉴 정도만 조였고.
성주는 남은 손으로 내 목이 감긴 줄 끝을 건네받았다. 직접 몇 번 당겨보더니 컥컥거리는 내 목소리에 미소를 머금었다.

“네놈 주제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연신 줄을 살짝살짝 당기던 그는 누렇게 뜬 앞니를 드러냈다. 내가 눈에 힘이라도 줄라치면 줄은 내 목을 더 조여들었다. 여인은 목에 칼끝이 닿은 상태에서 꼼짝도 못 한 채 여전히 눈물을 쏟아냈다. 목소리는 성주와 눈을 마주치면서 아예 삼켜버렸다. 온몸을 떨던 여인의 아랫도리가 젖어들면서 바닥이 흥건히 젖어들었다.

“네놈이 대신 베겠느냐?”

성주가 여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걸로 모자라 줄을 옆으로 당겨서 여인의 가슴팍에 머리를 처박히게 하였다. 지린내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보다 내 귀에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파고들었다. 호흡할 때마다 점점 심장 박동 소리는 더 빨라졌다. 그것도 잠시, 줄이 내 목을 다시 끌어당기더니 바닥에 이마부터 내리꽂게 하였다. 바닥에 흩어진 술잔 파편 중 하나가 이마를 찌르면서 깊숙하게 박혔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줄로 다시 일으켜서 앉게 한 성주는 얼굴이 붉어졌다. 난 분명 대답은 하였다. 나의 의식 여부와 관련 없이 계속 외쳤단 말이다. 다만, 입에 물린 재갈이 목소리를 아주 성실하게 막아내고 있었을 뿐.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자가 슬쩍 붙어서 귓속말을 남겼다. 괜히 뒤통수를 긁적이며 손짓하자 그제야 재갈이 내 입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입술과 혀에서 나온 피가 침을 대신하여 흥건히 적셨지만 오히려 말은 짧게나마 내뱉을 수 있었다. 정녕 내게 원하는 걸 얘기해보라고.

“드디어 과인의 의중을 살폈느냐?”

그가 눈을 번뜩이며 얼굴이 환해졌다. 여인에게 겨눴던 칼은 살짝 물린 뒤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쪼그려 앉았다. 줄은 여전히 꽉 붙잡은 상태였다. 군사들에게 일러 여인과 함께 물러나라 명하였다. 심지어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신하마저도 뒤로 몇 발자국 물린 뒤 자신의 얼굴을 내 귀에 살짝 갖다 댔다.

“긴히 해줄 일이 있느니라.”

첫마디를 시작으로 귓속에 들어온 얘기는 선뜻 믿기 어려웠다. 현재 탐라 서쪽 포구에 상륙한 고려군이 여기로 오는 중이라는 것. 성주는 그들과 부딪치지 않고 조용히 돌려보낼 생각이라 했다. 먼저 나랑 함께 내려온 탐라 부사 일행은 풍랑에 배가 난파되어 대부분 생사를 알 수 없는 것으로 하자는 것. 그 와중에 난 기적적으로 인근 포구로 떠내려왔고, 극진한 보살핌을 받던 중 우연히 역당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구출되어 지금 여기서 잠시 기거하며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게, 성주가 미리 생각해둔 자초지종이었다. 만약 조용히 고려군이 되돌아간다면, 내가 그들과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관대함을 베풀겠다는 얘기도 끝으로 덧붙였다.

일어서려던 그의 귀에다 내 얼굴을 서둘러 붙였다. 거절하겠다면 어찌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성주는 주먹으로 나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지를 펴더니 내 뒤쪽을 가리켰다. 물러났던 군사들이 여인을 포박한 채로 다시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칼을 들더니 성주가 호령하자 곧장 여인의 배를 찔러버렸다.

“이것이 과인의 대답이니라. 네놈과 함께 있던 녀석까지도 끌고 와야겠느냐?”

여인이 바닥에 쓰러져서 신음을 내뱉었지만 성주는 줄로 나를 끌어당기며 노려보았다. 붉게 물드는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온몸에 경련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대답 대신 끄덕이고 말았다. 여인의 신음이 귓속을 점점 파고드는 만큼 내 고개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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