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호 재경 유족회장, “배·보상 적극 요구할 것”

재경 제주4.3희생자및피해자유족회와 육지사는 제주사름은 4월 2일 오후4시부터 서울 가톨릭청년회관 3층 바실리오홀에서 김종민 전 4.3사건위원회 전문위원을 초대하여 '다시 4.3을 말한다'는 제목으로 제주4.3항쟁 68주년 기념 강연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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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에는 강종호·이재윤·허상수 재경 4.3유족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재경 4.3유족과 도민, 그리고 고시홍 소설가, 김규철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서울본부 의장, 김승호 전태일 노동대학 대표, 양문흠 동국대 명예교수, 박혜숙 푸른역사 대표, 권영옥 도서출판 장천 대표, 양윤모 영화영론가 등 사회각계 인사를 포함하여 100여 명이 참석, 4.3의 실상과 미해결의 현안 과제들에 대해 강의를 듣고 질문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강종호 재경 4.3유족회 공동대표는 여는 인사에서 3살에 강제징용에 끌려간 아버지를 잃고 재가한 어머니와 헤어져 조부모와 함께 살다가 8살에 몽둥이를 들고 초등학교에 모이라 하여 '폭도'로 찍힌 두 사람을 죽이는 데 가담하고, 곧바로 당시 14살이었던 삼촌의 행방을 대지 못한다는 이유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총살당한 후 '역사적인 고아'가 되어 살아온 통한의 삶을 증언했다. 그리고 4.19이후 4.3진상규명동지회 활동 이후 4.3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그간의 과정을 회고하면서, 유족들이 그동안 억울한 죽음에 대한 명예회복만 얘기했지만 이제는 배보상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운동을 벌일 것임을 밝히면서 사회각계의 지지를 호소했다.

김종민 전문위원은 "4.3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4.3이 4.3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탄압의 국면, 저항의 국면, 그리고 그런 탄압과 저항을 무색케하는 엄청난 수난의 국면이 겹쳐지면서 7년 7개월 이어진 것이 4.3이었다."고 4.3의 개요와 성격을 요약했다. 김 위원은 11살에 부모와 동생들을 잃고 혼자 살아 남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내가 15살만 됐어도…"라고 말하는 (15살 정도의 완력이 있었으면 집이 다 타기 전에 시신을 수습해서 묻을 수 있었다는 뜻) 어떤 유족의 사례를 얘기하면서 이제라도 트라우마 치유센터가 반드시 설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위원은 또한 당시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불에 타 폐허로 변해버린 제주도를 지금처럼 복원해낸 어르신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은 그동안 일부 극우세력들이 군법회의 수형자들은 당시에 죄가 인정된 것이니 희생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그간 재판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항들을 설명하고 당시 사형 선고를 받았음에도 육지에서 경찰로 있었던 경우, 군법회의 기록의 부재, 당시 9연대 관계자와 경찰의 증언 등 여러 근거를 들어 그 당시 법에 따라 군법회의 자체가 있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위원은 당시 갓난이부터 노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있는 초토화 국면에서 왜 혐의가 있다는 젊은이들은 굳이 군법회의라는 형식을 거쳐 육지 형무소까지 싣고 갔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는 법치국가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강연이 끝나고 2부에서는 주요한 쟁점들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초토화작전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대해 김 위원은 우선 한민당과의 결별, 총리 국회인준 실패, 반민특위 구성·활동, 미국의 원조 지연 등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권이 4.3을 극적인 반전의 계기로 이용하려 했을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제주도 반도들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라. 그래야 미국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제시했다. 아울러 당시 미국은 소련과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유럽에 집중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문제를 놓고 국무부와 국방부가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결국 철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시급히 사태를 평정하려고 초토화 작전을 밀어부친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미군정 시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협정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남한의 군과 경찰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4.3학살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초토화 작전 개입과 관련해서는 당시 작전을 수행한 송요찬을 포상하라는 서한을 보낸 것 등을 예로 들었다.

다음으로 4.3의 성격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프랑스 혁명도 온갖 양태들이 있었듯이 개개인 또는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아니라 전체적인 의미를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했다. 그런 점에서 4.3도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4.3봉기가 47년 3월 1일 시위에 대한 발포와 계속되는 검거, 고문치사 등 생존의 위협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를 '분단시대'로 본다면 분단을 반대한 민족사적 의미도 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다만 저항과 항쟁이이라 하더라도 4.3에서 수난의 측면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그 측면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덧붙여서, 무장봉기가 모험주의였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당시 봉기 주체들도 그렇게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무력충돌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고 장두의 책임만 묻고 대중의 불만을 무마했던 민란의 전통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 결과론적 평가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
이날 강연은 세 시간이 넘게 진행되었지만 참가자 대부분이 자리를 지킨 채 귀를 기울이면서 4.3의 참상이 구체적으로 언급될 때에는 탄식과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육지사는 제주사름은 앞으로도 내후년 70주년을 중요한 계기로 보면서, 군법회의 수형인들의 법적 투쟁, 4.3 당시 및 그 이후의 유족·도민의 삶에 대한 연구 등 진상규명 활동, 유족에 대한 피해 배·보상, 미국의 책임 인정, 4.3의 역사적 자리매김 등을 과제로 삼아 4.3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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