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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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현씨 제주도 친족회의 장파인 거로파 친족회를 제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은 나, 현임종이라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거로파의 종손인 현인홍 전 제주대학교 교수는 거로파의 맨 윗대 조상인 만호공 봉의 할아버지 묘제를 모시는 문제로 상당히 고민을 해 오고 있었다. 현 제주제일중학교 부지속에 모셔져 있었던 만호공 묘에 제를 모시는 재정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 책임지고 대책을 세워달라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재력이 많은 다른 괸당(칙족)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를 붙잡고 의논을 하신다.
문종 자손들에게 돈을 희사받아 제전을 마련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1977년 초, 현인홍 교수의 끈질긴 부탁에 시달리던 나는 “만호공 묘제를 모시는 문제는 금년부터 내가 책임질 터이니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하고 속시원하게 말씀드렸다.
아무 대책도 없이 어떻게 책임을 진다는 말이냐며 다 그쳐 물으셨지만, 내가 하는 것을 눈여겨 지켜 보시기만 하시라고 장담을 했다.
나는 1977년도 봄, 만호공 묘제를 준비하면서 만호공 자손 가운데 결혼한 사람 200여 명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문서를 보냈다.
⓵괸당님(친족님)! 만호공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⓶만호공 묘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⓷만호공 묘제는 언제인지 아십니까?
⓸만호공 누군지도 모르면서 현씨 자손이라고 하십니까?
⓹금년도 만호공 묘제를 제가 모시면서 괸당님들을 모시고저 하오니 아래 기재한 날짜와 장소로 꼭 참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만호공 묘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된 노형가지 괸당(친족)어른들은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왜 만호공 묘제를 모시느냐? 노형 친족들은 오래전부터 만호공 묘제에 안 가기로 했는데......”
노형 친족들이 만호공 묘제에 안 가기로 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그들에게 그 연유를 말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말씀을 종합해 보았더니, 당초 만호문제로 다툼이 벌어졌고, 재월제가 정상화될 때까지지는 노형가지는 만호공 묘제에 참석하지 않기로 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나는
“그런 깊은 사연이 있는 줄 모르고 현인홍 교수의 부탁으로 묘제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옛날 조상들 잘잘못까지 들추면서 불목하는 것도 안 좋은 일이니, 모두 덮어 버려야 화목한 친족회가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고, 눈 감고 지켜 보십시오.” 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양해를 얻었다.
평소 만호공 묘제에는 10여 명 정도만 모였으나, 내가 문서를 보낸 효과가 있었는지, 그 날은 50여 명 이상 참석했다. 묘제가 끝나고 총회를 시작하여 회무보고와 재정 상태 보고가 끝난 다음 내가 일어섰다.
나는 내가 묘제를 모시게 된 동기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번 묘제를 준비하면서 족보를 들춰 보니 만호공 자손 가운데 도내에 거주하는 결혼한 성인이 200여 명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일생에 단 한 번씩만 묘제를 모셔 주십시오. 그러면 한 순배 돌아오는데 200년이 걸릴 것입니다. 100년도 못 사는 우리가 만호공 묘제를 한번 모시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선착순으로 5명만 신청을 받겠습니다. 내년부터는 추가로 1명씩 신청을 받아 언제나 5명의 대기자를 보유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을 끝냈다.
내 말에 감명을 받았던지 너도나도 신청하겠다고 앞을 다투어 신청자가 순식간에 20여 명이 넘어섰다. 신청자 가운데서 연장자 순으로 5명을 지명하여 결정하였더니 차례에 끼지 못한 괸당들은 오히려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이것이 제도화도이 만호공 묘제를 한 번 모시는 것을 자손으로서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내 아이디어에 모두 감탄하였다.
만호공 묘제 모시는 문제가 해결되어 한숨돌리고 있는데, 만호공 묘가 제주 제일중학교 이설부지로 편입되면서 이묘하게 되었다. 당시는 허가받은 묘지가 아니면 아무데나 묘를 모실 수 없게 강력히 단속하고 있었다. 만호공 묘를 옮기는 문제로 3개월 이상 회의를 했으나 묘안이 없어 고민만 하고 있었다. 분명히 잘 살고 있는 괸당이 많음에도 말로만 떠들고 있음에 환멸을 느낀 나는 할 수 없이 내 개인이 제주도로부터 불하받은 가족묘지 643평 중 절반을 공짜로 나누어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거로파 친족회에서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면서 현장을 답사하러 올라갔다. 그런데 현장을 둘러보던 원로 어르신께서 “임종이는 성당다니니까 묘지가 좋고 나쁜 것에 관심이 없으니, 이런 불모지를 가족묘지로 불허받은 게지....여기는 안돼!”
하고 퇴짜놓은 것이 아닌가, 나도 공짜로 묘지를 드리면서 칭찬은커녕 쓸데없는 불만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없던 일로 합주!” 하고 내려와 버렸다.
회장직을 맡고 있던 현상흡 씨는 나를 달래랴. 원로 어른신을 설득하랴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제주에서 유명한 정시(지관)를 초청하여 현장을 답사하려 하고 있으니, 나에게도 입회해 다라고 부탁을 했다. 마지못해 현장에 올라가 보았는데, 그 지관은 쇄(지남철)를 놓고 사방을 한참동안 두루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산(한라산)앞에서(북쪽에서)이만큼 좋은 묘지라가 또 어디 있을 것 같습니까?”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좌청룡이 어떻고 우백호가 어떻고 떠들어대었다. 지관의 말이 그러하니 그제서야 집안의 원로어르신께서도 “영감님 말씀을 들으니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참으로 명당으로 보입니다.” 하고 어제의 불만은 어디로 갔는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러한 우역곡절 끝에 거로파 친족회의 묘지가 형성되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만호공의 배위와 자손 묘도 옮겨오는 동시에 실묘한 조상의 유혼비도 세우게 되었다.
묘지가 명당이어서인지. 조상님들이 자손들의 노력을 좋게 내려다 보셨는지, 자손 가운데 현경대 괸당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켜 5선까지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연주 현씨 제주도 친족회의 장파인 거로파 친족회가 이제 탄탄대로를 달리게 되었으니 누가 무어라 해도 나의 노력과 아이디어가 맡받침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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