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그녀의 얼굴에 푸른 혈색이 드러났다. 내 목을 감던 줄은 풀렸지만 숨이 도무지 내쉬어지지 않았다. 가냘프게 뱉어내던 그녀의 신음이 멈춤과 동시에 끄덕이던 내 고개도 굳어버리고 말았다. 성주의 손짓에 물러났던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바닥에 묻은 그녀의 혈흔이 그들이 지나가자 금세 사라졌고 엎어진 탁자도 눈 깜짝할 사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성주 역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탁상 위에 새로 올려놓은 술병을 들었다. 그 곁에는 낯선 여인들이 대신 자리를 채워놓았다.

"바닥을 침소로 삼는 건가?”

성주가 내게 잔을 내밀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왔다. 축 늘어진 양팔을 하나씩 잡아 일으켜 세우더니 그와 마주 앉혔다. 내 앞에 밀어놓은 잔은 술이 넘쳐서 흘러내렸다.

“과인의 뜻을 따르는 줄 알겠네.”

먼저 술잔을 비운 성주가 빤히 쳐다보았다. 곁에 서 있던 자들의 시선도 함께였다. 오른손으로 겨우 잔을 들었지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허리를 숙이려고 하자 성주가 손을 내저었다. 의자를 궁둥이에 붙인 채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붙잡았다. 자신이 한 모금 마신 술병을 내 입에 갖다 댔다.

곁에 있던 신하가 내 뒤통수를 끌어당겼고 벌어진 입으로 술이 들이닥쳤다. 목에 걸려서 도로 내뱉는데도 오히려 더 빨리 술을 들이부었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귀로 스며들었고 눈앞은 성주와 신하, 술병, 붉은 천장의 모습이 뒤죽박죽 섞이다가 금세 깜깜해졌다. 눈물 한 방울이 왼쪽 눈꼬리에서 뜨겁게 맺혔다.

“이보시게, 이보시게.”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였다. 눈을 서서히 뜨면서 먼저 보인 건, 문라건이었다. 여기로 오던 배에 올라탔을 때까지 썼던 것과 똑같은. 얼굴은 낯설었지만 차림새는 파란색 바탕에 금색 문양이 새겨졌고 허리는 붉은 띠를 둘렀다. 수염이 인중과 턱을 뒤덮고 아래로 길게 내려왔지만 눈가에 주름은 거의 없었다. 목을 짧았지만 얼굴형은 길쭉한 편이었고 눈매는 아래로 축 처졌다. 내 팔다리를 번갈아 주물럭거리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급히 옷매무시하며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내 앞에 낯선 자가 앉은 것보다 눈을 더 번뜩이게 한 건, 누운 곳이 침소였다는 것. 지푸라기가 아닌 두툼하고 폭신한 솜이 들어간 침구가 깔려 있었다. 새하얀 옷을 걸쳤고 내가 이곳에 입고 온 것과 똑같은 관복이 걸쳐져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자를 제외하면 주변은 아무도 없었다. 작은 서가, 탁자 하나가 한 구석을 차지할 뿐.

“당신은 누구시오?”
“어제 술이 과하셨소? 어찌 해가 중천까지 누워있을 수가 있소이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얼핏 나보다 연배가 젊은 듯하기도. 갑자기 재채기를 연발하던 그는, 콧물이 묻은 손을 내가 깔고 누운 이불에 닦아냈다. 미간에 힘주면서 쳐다보자 방금 그 손으로 물이 담긴 잔을 들이밀었다. 목은 꺼끌꺼끌했으나 얼른 손사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머리부터 팔다리, 온몸이 칼로 찌르는 듯 쑤셔왔다. 신음이 절로 터져 나오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봉변을 심하게 당하였나봅니다.”그가 재빨리 내 팔을 붙잡았으나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침구를 깔고 앉아서 그가 누구인지 다시 물었다. 자신의 옷을 터는 시늉하며 허리춤에 숨겨둔 패를 슬쩍 드러냈다. 얼마 전에 영암부사 밑으로 입관하여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라고 혼잣말처럼 슬쩍 밝혔다.

파견한 탐라부사의 장계가 전혀 올라오지 않고 전임 탐라부사의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조정에서는 급히 영암부사와 그 휘하 군사로 탐라의 현재 상태를 소상히 조사하라 명한 상태인 것도 함께 알려줬다. 어젯밤, 영암부사 일행이 당도하자마자 성주가 먼저 달려와서 그간 사정을 밝혔다고 했다.

“정녕 그대만 혼자 살아남은 것이오?”

그의 물음에 목이 다시 막혀왔다. 그건, 완전히 확실치 않았다. 여기서 내가 헛것을 보지 않았다면. 일단 주변을 먼저 살폈다. 정녕 이곳엔 그대와 나, 단둘인 건지 물으려고 했으나 흙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내 귀를 짧게 스쳤다. 눈을 비비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계속 쳐다보니 창호지 너머로 살짝 삐져나온 그림자가 드러났다. 헛기침과 함께 다시 몸을 뉘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는 그에게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으나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쳐다만 볼 뿐이었다. 같은 말만 되풀이하던 그의 멱살을 잡고 내 얼굴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귀에 내 입을 갖다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찌 귀에 바람을 넣으시오!”

너무 나지막했던 걸까, 그는 나를 재빨리 밀어내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다시 오라고 손짓했으나 그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결국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몸에 깊이 박힌 흔적들을 보라고 손짓했으나 오히려 그는 기겁하며 뒷걸음질하다가 넘어지기에 이르렀다. 다가가려고 하자 머리맡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고 때릴 시늉까지 했다. 양팔을 내밀고 해명하려던 차에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성주와 함께 갑옷 차림의 낯선 사람들이 함께 들어왔다. 그는 의자를 내던지며 일어나더니 서둘러 성주 옆에 서 있는 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남겼다. 성주는 입꼬리를 애써 올렸으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을 잡았다. 내게 눈을 살짝 흘겼는데 다른 데로 눈동자를 돌리며 바닥에 떨어진 옷부터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대가 정녕 탐라부사를 수행하였는가?”

귓속말을 듣던 자가 내 앞으로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곁에 있던 그가 이르기를 조금 전 잠깐 얘기했던 영암부사라고 하였다. 옷도 다 입지 못 한 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는 살짝 숙인 채, 눈동자로만 영암부사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턱에 각이 졌고 양쪽 눈은 각각 크기가 다르고 눈썹은 거의 없으며 수염 역시 그리 길지 않은데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좁은 어깨와 성주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신장으로 체구가 전체적으로 왜소했다. 갑옷 자체가 몸집에 비하면 헐렁할 지경이었다.

“혹여 우리가 구면이었던가?”

그의 물음에 머릿속을 스치는 모습이 있었다. 처음 등청한 날, 퇴청하자마자 장인어른이 근처 주루에서 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향내가 짙은 여인이 직접 술잔을 채워줬는데 그 맛이 가히 어깨춤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장인이 양온서 관리에게 슬쩍 귀한 술을 직접 받아온 것인지라 평생 맛보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술병을 반 정도 비워내고 눈앞이 빙 돌아갈 때쯤 낯선 자가 들어왔다. 낮은 목소리로 장인과 몇 마디 나누더니 내가 마셨던 술을 한 잔 받아 마시고는 금방 사라졌다.

“얼굴을 기억해두게나. 언젠가 또 볼 지도 모르니.”

장인은 남은 술을 비워냈다. 중요한 책무로 잠시 지방에 내려가지만 돌아온다면 크게 쓰일 인재라고 하였다. 술기운이 올라와서 자세히 보진 않았으나 장수치고는 체구가 왜소하다고 물었더니, 비록 문관으로 시작하였지만 담략이 뛰어난 자라고 하였다. 어사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일을 제대로 해 내왔다는 것. 전하께서 친히 관심을 보이시고 직접 중요한 일을 맡겼으니 본받으라는 훈계까지 기억에 남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의 눈이 점점 커지다가 성주 얼굴을 살짝 흘겼다. 이내 표정을 굳히며 바로 뒤에 선 수하의 귀를 빌려 속닥거렸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성주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수하로부터 건네받은 서책을 펼쳐 들었다. 내용을 살펴보던 성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낯빛이 급격하게 더 어두워진 영암부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자는 여기에 이름이 없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성주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곁에 있던 그의 신하들도 서로 눈치만 살펴볼 뿐이었다. 영암부사가 헛기침과 함께 턱짓하자 뒤에 서 있던 고려 군사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나를 묶었다. 성주가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자 영암부사는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더니 내게 겨누었다.

“이자는 삼별초가 보낸 간자일지도 모르오. 우리가 친히 심문하겠소.”

겨우 아랫도리만 가리고 줄에 묶이는 사이, 성주는 고려군 몇몇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다.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자신도 알아야겠다는 말은 영암부사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성주는 힘이 들어간 두 눈으로 나와 영암부사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각오하여라.”

성주가 나간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영암부사가 다시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과 입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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