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차갑게 변한 공기가 내 목구멍으로 스며들었다. 영암부사는 성주가 나가자마자 수하를 따로 불렀다. 우리가 나가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곳에 얼씬 못 하도록 철저히 지키라고 일렀다. 그것도 모자라 방금 나를 묶은 군사들 역시 출입문을 지키되 허락 없이 억지로 들어오려는 자, 누구라도 즉각 처치하라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군사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무기를 재차 확인하였다. 영암부사 그 역시, 자신의 칼을 조금 빼다가 도로 집어넣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난 애써 입꼬리를 슬쩍 올려보였다. 이내 나를 등지고 서서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몸을 돌렸다.

“이곳에 그대의 이름이 없다, 맞는가?”

그의 손에는 조금 전 성주와 있을 때 보여줬던 그 명부가 들려있었다. 물론 거기에 내 이름이 있을 리는 없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진작 그가 먼저 얘기했던 게 아니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라가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그는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더니 내 얼굴에 입술을 살짝 갖다 댔다. 입에서 풍기는 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여서 하마터면 재채기가 나올 뻔했다.
“난 그대가 누군지 알고 있네.”그건, 진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조금 더 보태자면 안면도 있는 사이에 줄로 꽁꽁 묶는 건 너무한 건 아닌지, 묻고 싶었으나 도로 생각으로만 깊숙이 묻어뒀다.

“사정은 이미 들었네.”

그의 콧바람과 함께 들린 얘기에 내 귀가 절로 쫑긋했다. 이들이 여기로 내려오기 전, 나주 지방에서 수군이 항로가 미심쩍은 상선을 추포한 적이 있었다. 그 배가 바로 탐라에서 올라온 것. 행로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 가까운 관아로 압송했고, 배를 샅샅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궁으로 들어갈 진상품과 함께 줄로 묶어두고 숨겨둔 사람들을 발견한 것.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나와 함께 탐라에 내려온 조졸이었다. 거의 죽음에 가까웠던 그가 힘겹게 증언한 내용은 나주 부사와 안찰사를 거쳐 며칠 만에 조정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문제는 조정에서 그 역시 공범일지 모르니 면밀히 조사하라고만 한 것. 안찰사는 명을 그대로 따르려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영암부사가 직접 안찰사를 찾아가 밤새 독대한 뒤 직접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조정에서는 금방 결정을 내리지 못 하자, 전하가 친히 안찰사와 영암부사를 함께 불러들였다고 한다. 사로잡은 자들은 조졸까지 포함하여 조정에 올려보내고, 영암부사 앞으로 군사 여럿을 붙어 삼별초 방어를 공식적 명분 삼아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자네가 나를 도와야겠네.”

내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도와달라면서 어찌 나를 묶을 수 있냐고 되묻자,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뒤통수와 어깨를 한 번에 손으로 쓸어내렸다. 발끝에서 무릎과 허리를 거쳐 뒷목까지 올라온 냉기는 과연 기분 탓인 걸까.
내가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군사들이 다가와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끌려 나가는 내 어깨를 거듭 매만지며 부디 잘 부탁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고개를 얼른 내젓고 싶었으나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어서 실토하라, 네놈의 배후가 누군지!”

밖으로 끌려 나오자마자 흙바닥에 무릎부터 꿇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나긋했던 그의 목소리는 고막을 찢어버릴 듯 한껏 올라가 있었다. 친히 내 가슴팍을 걷어찬 뒤에 멀찍이서 지켜보던 성주 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한창 얘기를 나누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곁을 지키던 군사들이 칼까지 꺼내며 서로 겨누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사이 탐라 군사가 다가오더니 나를 지키던 고려 군사에게 비키라고 하였다. 나는 무릎 꿇은 상태에서 슬며시 고려 군사 곁으로 바짝 몸을 붙였다. 탐라 군사가 손짓하자 사방에서 몇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칼을 빼들었다. 고려 군사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천천히 칼을 빼내더니 느닷없이 내 목에 겨누었다.

“조금만 다가오면 이자의 목이 날아갈 것이다!”

목덜미에 날이 바짝 붙더니 따끔거렸다. 혀끝에 살짝 남았던 침이 갑작스럽게 메말랐고 숨도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우리 주변을 빙 두른 그림자는 서로 중얼거리듯 얘기를 주고받을 뿐 선뜻 다가오진 않았다. 흙에 발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금세 내 주변은 시커먼 그림자들로 가득했다.

“어찌 고집을 피우시오!”

“내가 할 소리외다. 이 땅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 소관입니다!”

내 앞에까지 와서도 영암부사와 성주는 각자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슬쩍 살펴보니 이들은 여전히 서로 경계하면서 칼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목덜미에 칼날은 조금 전보다 더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이젠 신음 대신 깊은 한숨이 나왔다.

“이자는 간자로 의심받을 충분한 이유가 있소.”“분명 스스로 탐라 부사와 함께 내려온 관리라 하였소.”“명부에 기록되지 않은 건 어찌 설명할 것이오?”

“이름을 숨기는 게지. 네 이놈, 어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가!”

성주의 그림자는 나를 향했다. 성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은 하얗게 뒤덮였다. 영암부사와도 눈이 마주쳤지만 어떤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팔다리가 절로 경련에 휩싸였고 이마는 땀을 머금기 시작했을 뿐.

“양심이 있다면, 어찌 우리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소.”

“과인은 그대들을 믿지 못하겠소.”“과인은?”영암부사는 물론이고 고려 군사들의 시선이 모두 성주를 향했다. 탐라 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했다.

“어젯밤에 술이 과했나 보오. 헛말이 나왔소이다.”

성주는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손짓으로 자신의 군사들이 칼을 내리게 하였다. 영암부사는 성주와 탐라 군사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성주가 무기는 거두고 따로 술이나 한 잔 나누자며 웃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어디든 데려가도 좋다고까지 했으나 영암부사는 여전히 어떤 반응도 없이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성주의 얼굴도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미간에 잔주름이 하나둘씩 굵게 자리 잡았다. 그사이 나는 고려 군사의 손길에 조금씩 뒤로 빠져나왔다.

“꼴을 보아하니, 세상을 다 가진 듯 의기양양하구나. 어디서 천한 주둥이로 전하를 모독하는 게냐!”영암부사는 금세 칼을 빼내더니 성주의 목에 겨누었다. 그것도 잠시, 저 멀리서 화살이 날아오더니 영암부사의 칼을 쳐냈다. 그가 몇 발자국 물러나자 탐라 군사들도 각자 무기를 꺼내들고 성주 곁을 에워쌌다.

“아무리 조정에서 보낸 자들이거늘, 과한 거 아닌가!”

성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영암부사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탐라 군사들이 칼날을 내밀며 막아섰고 고려 군사들은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나를 붙들고 있던 자는 귓속말로 섣불리 어디 움직이지 말라면서 줄을 살짝 풀어준 뒤 그들 무리에 합류하였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면서 마침 뒤편에 있던 나무 아래로 피했다. 그사이 누구도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목덜미에서 조금씩 흐르는 피를 막으며 몸을 기대었다. 점점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은 흙먼지를 일으켰다. 고성이 수차례 오가는 것도 잠시,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먼지가 희미해질 새도 없이 하늘은 수백 개의 화살이 뒤덮였다. 괴성에 가까운 신음은 더욱더 하늘 높이 치솟았다. 잠시 주춤거렸던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나무에 몸을 바짝 붙였고 그들의 소리는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이 잠잠해지면서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닥에 널브러진 화살이었다. 특히 내가 무릎 꿇었던 자리에는 다섯 발이 있었고 그중 두 발은 촉이 깊숙하게 박힌 상태였다. 화살이 많이 쏟아진 곳에는 차갑게 식어가는 그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양쪽 모두 쓰러진 자들은 많았지만 특히 내 눈을 쉽사리 못 감게 한 건, 바로 멀쩡하게 서 있는 영암부사였다. 쓰러진 자들도 고려 군사보다는 오히려 탐라 군사가 훨씬 더 많았다. 성주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암부사가 호령하자 건물 곳곳에서 활을 든 고려 군사들이 나왔고 그중 몇몇은 탐라 군사의 시체를 질질 끌고 나오기까지 했다.

“자네, 괜찮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영암부사가 활짝 웃고 있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등골에는 여전히 뜨거운 땀방울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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