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럽]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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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민속촌을 지날 때마다 늙은 폭낭이 우거져 있는 것을 보면 나를 훌쩍 어린시절 추억으로 돌려놓곤 한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도 늙은 폭낭이 여기저기 여러 개 서 있어, 어린 우리들에게 즐거운 놀이터가 되곤 했다. 늙은 폭낭은 이미 그 당시에도 500년 이상의 수령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들은 나무굵기를 가늠해 보려고 여렷이서 팔을 맞잡고 둘러서서 재어 보곤 하였다. 늙은 폭낭 밑에는 의혜 사람들이 모여와 앉아 놀 수 있도록 돌팡(자리터)잉 마련되어 있어 한여름 더위를 폭낭 그늘 아래서 쉴 수 있게 했다.
지금처럼 경로당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의례 폭낭 그늘이 사람들이 모이는 집합장소였고, 이 곳에서 나누는 얘기에 재미붙여 시간만 있으면 모두가 이 곳으로 모여들곤 했다.
우리 어린것들은 원숭이처럼 폭낭 위로 기어올라가 재역(매미)과 주렁(등에)을 잡았고, 폭낭 열매를 따 먹었다. 군것질할 것이 별로 없었던 그 때는 폭낭 열매가 어린이들의 유일한 먹을 거리여서 너도나도 나무위로 올라가 따 먹었는데,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어린 동생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형들이 폭나무 가지를 꺾어 아래로 떨어뜨려 주기를 기다리며 쳐다보기만 했었다.
나무 위에서 재열(매미)이나 주억(등에)을 잡으면, 실에 묶어 동생들 손에 쥐어 주었고, 잘못하여 실을 놓치는 바람에 재열이 날아가 버려 대성통곡하는 동생을 위해 또 다시 원숭이마냥 폭낭 위로 올라가기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말기 제주 상공에서도 미국 비행기와 일본 비행기가 공중전을 벌였는데, 그 때 요란스러운 기관총 소리에 잔뜩 겁을 먹으면서도, 기어이 폭낭 위에 올라가 구경을 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무모한 짓이었다.
이 늙은 폭낭들은 우리 조상들이 심어 놓은 것이었고, 폭낭이 우거진 마을은 이미 유규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마을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면 늙은 폭낭이 버티고 있는 마을들을 간혹 볼 수가 있다.
그 폭낭들은 4.3사건 때 어떻게 살아남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우리 동네의 늙은 폭낭들은 4.3사건 때 모조리 베어지고, 불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니, 남아 있는 폭낭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남아있는 늙은 폭낭이라도 없애지 말고 자연유산으로 길이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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