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앞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대정현 사람들이 지대(支待)하려고 역(帟:위를 가리는 작은 장막)을 이곳에다 가설하여 놓았다. 이미 자리에 나아가자, 주쉬(主淬:대정현의 수령)가 와서 알현하였다. 준비하여 오랜 시간 동안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들었다. 대정현은 3사(舍:1舍는 30里) 거리에 있다. 산골짜기에 높이 건너질러 놓은 다리들이 여러 번 꺾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었고, 가까운 곳에 인가도 없었다. 부득이 노숙할 계획을 세었다. 피곤한 아전들과 서너 마을의 백성 열 남짓한 사람들의 공억(供億: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갖춰 내어 발사(茇舍:풀 가운데 휴식처)에 이바지하였다. 유람관광으로써 백성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어 가히 후회스러웠다.
저녁 식사 뒤에 달이 떴다. 막사 앞으로 나와 바위 면들을 살펴보았다. 푸르게 하얀 색깔을 띠어 가히 알아 볼 수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하여 곧바로 보자, 곧 고집스레 생긴 한 절벽이 견주어 자기보다 낮은 것들을 엿보고 있었다. 기이한 형상에 갑자기 정신이 팔려 멍청하게 넋이 나가 버린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마침내 막사로 들어가서 등불을 걸고 산행을 기록하는 시(詩) 약간 수를 지었다. 이불을 둘러앉았지만, 바람 기운이 심히 살을 에는 듯이 지독하여 격막(膈膜)이 아려와 기운을 펼 수도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능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옆 장막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코 골며 자는 소리가 들렸다. 이르기를,󰡒일어나오, 일어나오! 오늘의 유람은 즐거웠소? 영실에 부는 바람은 어떠하오? 한라산의 구름은 큰 나무들을 옮기고서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니, 어찌 이른바 오백장군을 보았겠소?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공자님의 도(道)를 높고 멀다고 여기서 해보지 않은 채 힘써 도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비유컨대 어제 산 중턱에서 뱅뱅 돌았던 일이오. 육예(六藝)를 낮고 쉽다고 생각하여 숭상하지 않고 대신 괴이한 책자와 기이한 패설(稗說)을 보기 좋아하는 것은, 비유컨대 오늘 영실에서 기이함을 뒤지는 일이오.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비유컨대 가시나무 숲과 바위 사이에서 곁가지만을 뒤적이며 캄캄하게 찾는 것이오. 때로 비단 무늬의 철쭉과 귀신이 깎아 놓은 절벽을 보아 기이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들이 거의 볼 수 없는 바이기 때문이오. 또 비바람을 일으키는 신에 대한 얘기로써 위협하여, 나로 하여금 노숙하게 하며, 격막이 아리도록 하는 것은, 모두 이것이 귀신이 내리는 재앙의 빌미이며, 이것이 가히 징험인 것이어.
드디어 한 떠들썩한 무리와 함께 앉아서 묘시(卯時:오전6시)를 기다리며 남극에 있는 노인성(老人星)을 보려고 하였지만, 또 구름이 희롱을 부려 과연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날이 뜨자 조반을 재촉하였다. 말에 올라 뒷 구릉을 넘어 서북쪽으로 갔다. 금덕(今德)과 곽녕(郭寧:光令) 경계를 지나 사소(四所) 목장으로 나왔다. 길이 조금 평탄하여졌다. 많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울창하였고, 단풍잎들이 반쯤 묽어져서 가히 사랑할 만하였다. 말 위에서 주자(朱子:朱熹)가 지은 무이 도가(武夷櫂歌) 구곡(九曲)을 암송하였다. 눈앞에 시원하게 상마(桑麻)가 나타나니 평평한 하천 같이 보이녀(將窮眼豁然桑麻雨見平川)이라는 구절에 이르자 마음과 정신이 깨달음이 있어 쾌활하였다.
오시(午時:12시)에는 이생(利生:광령 2리) 촌사(村舍)에서 말을 갈아탔다. 30리를 행보하여 서문(西門) 길을 따라 감영(監營)에 되돌아 왔다. 해는 아직 포시(哺時:오후 2시 전후)가 안 되었다. 멀리서 한라산을 바라보니, 높이 은하수 속에 꽂혀 있었다. 역력함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듯하였다. 영실을 되돌아보았지만 이미 볼 수 없었다. 촛불 시중꾼을 불러 붓을 잡고 이 기행문을 적고서 같이 노닐었던 여러 사람에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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