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이유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와 만나는 곳

중고책이 모여서 존재하는 것이 헌책방이다. 모여 이루어졌고, 버려지지 않아 존재하는 곳. 수천 권, 수만 권의 책을 모을 여력은 있어도 몇 년 된 수험서 한 권 버릴 여지는 없는 곳이다. 제주도에는 두 개의 헌책방이 있다. 노형동에 ‘동림당’, 시청 맞은편에 ‘책밭’. 이곳 서점 주인장들은 같은 말을 했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세상에 필요 없는 책은 없다”고. 

한두 해 모은 것이 아닐 텐데, 과연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만 했을까. 이들이 모으는 책은 다종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흥미로운 맥락이 있다. 알고 보면, 박물관의 경지다. 예를 들어, 책밭은 제주도 향토사를 연구하기 충분한 5천 권 이상의 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있다. 또, 동림당은 중국과 일본, 국내 희귀 고서를 수십 년째 셀 수 없을 정도로 모으고 있다. 

하루에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있고, 많으면 열 명 남짓 들르는 곳. 존재하는 이유가 곧 존재할 수 없는 이유와 만나는 곳. 제주도에 아직 남아 있는 헌책방이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찾아가 봤다.

▲ 골목 안, 책밭을 알리는 정겨운 입간판. ⓒ뉴스제주

 

<1> 20년 넘게 유일했던 제주 헌책방, ‘책밭’ 

“더우면 이거 써요.” 다가온 주인장이 구석에 놓아 둔 부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책밭 서점 곳곳에는 부채가 놓여 있다. 입구 문은 늘 열려 있고, 에어콘은 없다. 실종되어 노닐다 갈 수 있는 곳, 세 번만 오면 어디에 어떤 책이 꽂혀 있는지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는 곳이다. 낯이 익었다 싶으면 차 한 잔 부탁해 책 이야길 나눌 수 있는 곳, 헌책방이자 동네 사랑방인 곳이다.  

책밭은 1985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의 김창삼 대표가 인수한 시점은 1992년, 그 전까지는 그도 책밭을 오가는 손님이었다. 30대 중반, 회사를 다니던 그가 책밭을 인수했을 때 그곳은 5평 규모의 작은 헌책방이었다. “지금 자리까지는 네 번의 이사가 있었어요. 확장을 위해 이사했고, 운영이 힘들어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도 이사했죠. 그간 3개의 헌책방이 생겨났다 사라졌어요. 그리고 20년 넘게 제주도에 헌책방이라곤 책밭이 유일했습니다.” 

 

▲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편 책상에 앉아 있다. 한결같은 책밭 김창삼 대표. ⓒ뉴스제주

2000년을 기점으로 인터넷이 보급되고, 손님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 만했다면, 헌책방이 책밭 한 곳만 존재하지는 않았을 일이다. “2007년에 텃밭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돈을 벌 요량으로 크게 벌여 봤는데, 유기농이라 수익이 나지는 않았어요. 어려워서 지금은 규모를 줄였죠.” 주인장 부부는 요즘도 새벽 4시 30분에 밭에 나간다. 그래서 책밭은 오전엔 닫혀 있다. “전에는 오후 3시에 문을 열었어요. 농사를 크게 지었을 때 그랬고, 지금은 오후 1시에 열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한때는 그랬다. 사장님이 밭에 나갔을 수 있으니, 전화 문의를 하고 가야 한다고. 책밭 이용자들은 다 그렇게 알고 미리 전화를 하는 게 당연했다. 

책밭은 문을 연 시점으로 보면 30년이 넘었고, 인수한 시점으로 보면 곧 30년이다. 짧지 않은 운영 기간 동안 어떤 책들이 모였을까. “백과사전은 모으지 않고 있어요. 책을 버리기 전에 미리 전화를 주면, 찾아가 보고 구입하기도 하죠. 하지만 대부분 중고책을 도매로 취급하는 '헌책방 위 헌책방'으로부터 책을 삽니다. 필요한 책은 미리 부탁해 두죠."

▲ 책 백화점, 모든 책이 다 있다. 어제 나온 신간은 없어도 300~400년 된 책은 있다. ⓒ뉴스제주

그렇게 헌책방 위 헌책방으로부터 향토사 서적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20년이 넘었다. "도외에서 헌책방을 통해 제주 향토사 관련 서적을 구하고 있어요. 지금 책밭 아닌 다른 곳에 5000권 정도 모아 뒀습니다.” 도내 말고 도외에서 제주 향토사 서적을 구하는 이유는 뭘까. “제주도나 제주 관련 기관에서 기록이 될 책을 만들죠. 판매하지 않는 책들이잖아요. 그 책들은 도외로 기증본을 보내요. 그 책에 관심 없는 이들은 기증 받은 책을 헌책방에 내다 팔아요. 나는 그 책들을 수소문해 구하는 거죠.”  

처음엔, 제주 관련한 책이 중고책으로 나와 있는 게 마음 쓰여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7년에 태풍 나리로 인해 농사를 망쳤을 때 인건비 충당을 위해 도서관에 2000권을 내다 판 적이 있다. 눈물을 머금고 팔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도 5000권을 모았으니, 김창삼 대표는 도서관 못지 않은 향토 서가를 가진 유일한 도민일 거다. “헌책방을 시작하고 향토사 서적 모으면서 향토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당장 가능하진 않겠지만, 시외에 2층 집을 지어 책방을 만들고 싶어요. 향토사 서가는 따로 만들고 싶고요. 오래 머물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책방이면 좋겠죠. 사랑방이자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이요.”

▲ 1937년에 300부를 찍었다는 <조선사>를 위한 사료집. 책밭에는 66번째 책이 보관되어 있다. ⓒ뉴스제주

새로 구상하는 그 공간도 밥벌이를 하기에는 쉽지 않을 거다. 궁금했다. 책방 수익으로 생활이 어려웠을 텐데, 다시 직장에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는지. 게다가 당시 그는 고작 마흔으니까 말이다. "직장 생각은 한번도 해 본 적 없어요. 물론, 생활은 어려웠죠. 그래서 이곳에 이사오기 전에 정리할까 생각을 했었어요. 그때 식구들이 말렸죠. 가족들이 아빠가,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책밭이 30년간 제주도 헌책방으로 자리할 수 있던 저력은 가족의 지지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 책밭을 인수하겠다고 했을 때도 "당신이 좋다면"이라고 말하던 아내, "아빠가 좋다면" 지지하던 딸이 있었다. 그러니 김창삼 대표가 포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의 가족이 다함께 책밭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 이것을 생각하면, 책밭이 더 넓고 편한 자리에서 도민의 사랑방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 이곳을 아끼는 모두가 책밭, 자신만의 서가 지도를 놓치지 않고 즐거이 여행하기를.*

 

▲ 을유문화사에서 1949년 출판한 <임꺽정>. ⓒ뉴스제주

 

<헌책방 '책밭'>

-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260-26
- 문의 : 064-752-5126
- 운영 시간  : 오후 1시 ~ 8시, 일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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