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뉴스제주

그들이 쏘아 올린 화살이 바로 코앞 닿기 전, 건너편에서 먼저 괴성이 터졌다. 호령과 함께 가장 먼저 뛰쳐나온 영암부사는 바로 뒤따른 고려군사들과 함께 빠르게 진격하였다. 나와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일어서려는데, 우리 뒤편에서 불화살이 치솟더니 하늘을 금세 뒤덮었다. 그들이 영암부사가 이끄는 선봉대와 부딪치기 바로 직전에 괴성을 하나둘 쓰러졌다. 그들의 전열은 순식간에 난잡하게 뒤엉켰고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말 울음이 뒤섞이며 사방으로 흩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자네, 뭐하는가!”

내 곁에 있던 군사가 팔을 끌어당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기라도 하나 챙겨달라고 했더니 그의 손가락은 발바닥 앞에 꽂힌 화살을 가리켰다. 손에 쥔 돌멩이와 화살을 번갈아 보다가 남은 손으로 화살대를 잡아당겼다. 절룩거리면서 앞선 군사들처럼 함성 비슷한 고성을 내지르며 내달렸지만 돌부리에 붙들려 얼굴이 땅과 조우하고 말았다.
일어날 새도 없이 바닥에 진동이 울리면서 낯선 그림자의 발이 내 코앞을 스쳐 지났다. 흙과 섞인 물방울은 금세 얼굴을 적시고 말았다. 몸을 완전히 일으켰을 땐, 이미 눈앞엔 횃불이 바닥을 뒹굴었다. 풀들은 불을 붙잡더니 바람과 함께 격렬한 춤사위를 일으키며 높이 솟아났다.
바로 곁으로 달려든 불길에도 그들은 오히려 그 속으로 달려들었고 쓰러뜨린 자들을 밀어 넣기도 했다. 점차 귀를 예리하게 찌르는 괴성보다 콧속으로 스며든 연기가 몸을 뒤흔들었다. 그저 돌멩이만 쥔 채, 점점 치솟는 불길 속에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쓰러지는 그들의 그림자를 바라만 보았다. 누구와도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진 않았지만 그 모습만큼은 정확히 담아냈다.

“쫓아라!”

영암부사가 뻗은 칼끝 쪽으로, 몇몇의 그림자가 말을 타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명을 받은 군사들이 주인 잃은 말에 올라타고 곧장 뒤를 쫓기 시작했다. 여기서 멀쩡하게 서 있는 자들은 모두 고려군사들이었다. 남은 침입자들은 불길 속에서 겨우 뛰쳐나오다가 붙들렸고 그 속으로 도망가려다가 붙들렸다. 불길은 여전히 높고 길게 자리를 잡았으나 곧바로 고려군사들이 물속을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연기가 불길을 대신할 때쯤 기절하거나 미처 도망치지 못 한 자들이 붙잡혔다.

“거기서 뭐하는가!”

주변을 둘러보던 영암부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난 여전히 제자리에서 돌멩이를 꽉 쥐고 콧물만 연신 흘릴 뿐이었다. 가장 가깝게 있던 얼굴에 핏물과 시커먼 흙먼지를 뒤덮은 군사 한 명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화살을 바닥에 던져놓고 그의 손가락 끝을 살포시 잡았다.

“자네도 몰골이 영 아니구먼. 살아있으니, 다행일세.”

내 어깨를 두드린 영암부사는 자신에게 다가온 낯선 군사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사이 붙잡힌 자들은 굵은 줄에 꽁꽁 묶여서 발길질로 바닥을 이리저리 굴렀다. 격한 몸부림과 함께 억지로 일어난 자에게는 주먹으로 얼굴과 배를 난타하기도 했다. 오히려 전투가 일어날 때보다 흙먼지가 더 일어날 정도로. 퇴각한 자들을 쫓던 군사들이 돌아오고서야 발길질은 멈췄다. 눈짐작으로 열네댓 정도였는데 모두 얼굴부터 팔다리가 시퍼렇게 물들었고 그중 대여섯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숨도 거의 내뱉지 못 했다. 복면이 사라진 그들의 얼굴은 튀어나온 뼈에 겨우 가죽을 덧댄 듯 메말랐고 팔다리는 칼자루보다 더 가늘었다. 눈에 초점이 없는 앳된 자, 치아가 하나도 남지 않은 노인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분명 군사들과 엉킬 때와 달리 모두 어깨가 축 늘어져서 그저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돌리는 자도 있었다.
영암부사는 돌아온 군사들에게 보고를 받고 잠시 낯빛에 그늘이 스며들었지만, 이내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높이 세웠다.

“오늘 밤은 월광에 취해보자꾸나!”

군사들은 양팔을 높이 들고 함성에 먼저 취했다. 나도 함께 양팔은 들었지만 선뜻 목소리는 내뱉을 수 없었다. 지금쯤, 지슬은 과연 거기서 어떻게 있단 말인지. 쥐고 있던 돌멩이도 차마 내려놓지 못 했다.

“탐라가 정녕 심상치는 않구려.”

군사들은 전투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데다가 막사를 지었다. 나처럼 부상자들은 임시로 가장 먼저 설치한 막사 아래 자리를 잡았다. 영암부사가 자신의 어깨를 매만지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온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와 섞인 땀내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얘기에는 귀를 조심스럽게 세웠다. 거의 수세에 몰린 우리를 도운 자들은 바로 영암부사, 그의 수하들이었다. 탐라에 상륙하기 전, 따로 후발대를 선별하여 일부러 앞바다에 주둔하도록 뒀다. 본진에서 직접 부르지 않는 이상, 상륙해서 안 된다는 명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지만. 후발대의 부장은 시진마다 물결과 바람이 다른 탐라의 앞바다를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고, 마지못해 상륙하던 차에 고려군 깃발을 먼저 발견한 것이었다. 저 멀리 추격하던 침입자들의 모습에 서둘러 화살로 신호를 보냈더니 영암부사가 발견하고 여기까지 이끌었다.

“장군,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나이다!”

후발대의 부장이 영암부사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전투 직후에 죄를 구하려고 했으나 영암부사가 먼저 그를 추격대에 합류시켰다. 돌아오자마자 무릎부터 꿇은 그를 잠시 바라보던 영암부사는 깊은숨과 함께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아줬다.

“그대의 판단이 우리를 살렸네.”
“하오나, 지엄한 군령이 있사온데…….”
“잊지 마시게, 자넨 우리 그러니 고려를 살린 걸세! 조정에 올라가면 전하께 직접 고하겠네.”
“장군!”

부장은 눈시울이 붉게 물들이며 꿇은 무릎 자세로 큰절을 반복하였다. 영암부사는 눈에 힘을 주며 손사래했으나 슬쩍 자리 잡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을 갑작스럽게 돌덩이처럼 멈추게 한 건, 막사 바로 바깥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였다. 팔이 뒤로 묶여 무릎을 꿇은 자세로 우리를 계속 쳐다보던 침입자 중 하나였다. 군사들의 호된 매질에도 정체는 절대 실토하지 않았으나 말투 자체가 여기 사람이었다. 특히 저자는 왕자와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며 전투를 치르다가 잡힌 것. 다른 자들에 비해 기골이 장대했고 삐쩍 마른 얼굴에 박힌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아직도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디 이신 자들은 이디서 죽을 거우다. 게난 지꺼정허지 맙서.”

다들 완전히 그의 말을 알아듣진 못 했지만 아주 못 알아들은 눈치도 아니었다. 부장이 벌떡 일어나서 직접 욕지거리와 함께 발길질로 바닥에 내리 꽂았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부장의 얼굴과 칼에 핏물을 덮어쓰고서야 잠잠했다. 그러나 그사이 공기만큼 꽉 채운 정적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막사를 설치하고도 고려군사들 모두 눕지 못 한 채, 서 있거나 앉은 채로 깊어지는 정적에 몸을 맡겼다. 영암부사는 막사 앞에 서서 하늘만 올려다보며 갑자기 불어 닥치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동이 틀 때쯤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척후 군사들이 돌아왔다. 한두 방울씩 내리는 비와 함께 정적을 밀어내고 보고를 받은 영암부사는, 서둘러 전열을 정비하라고 호령하였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면서 군사들의 움직임이 엉키긴 했으나 서둘러 막사까지 정비하고 영암부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그 전열의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전날 쥐었던 돌멩이를 아직도 놓지 않은 터라, 손가락에 감각이 미미했다.

“지난밤, 완전하지 않은 승리에 취하지 않겠다, 수괴의 목을 베어 전하께 바치겠노라!”

영암부사의 목소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카롭게 치솟았다. 지난 밤, 과연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청아한 소리에 군사들은 모두 굵다란 함성으로 답하였다. 나도 함께 양팔을 들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괜스레 눈시울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더니 목까지 턱턱 막혔다. 걸쭉한 것이 목에 걸려서 기침과 함께 뱉었더니 가래 위로 피가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손에 쥔 돌멩이를 떨어뜨렸고 섣불리 침을 삼키질 못 했다.

“진군하라!”

함성이 잦아들면서 군사들의 시선은 영암부사가 칼끝으로 가리킨 곳에 모였다. 뿌연 안개가 서서히 물러나면서 드러난 건, 바로 그곳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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