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고국 전시로 서울에서 제주, 도립미술관 10월 30일까지

▲ 제주도립미술관에서 10월 30일까지 <고국의 품에 안긴 거장, 변월룡>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뉴스제주

“그의 손은 굉장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라. 물감이 마르지 않았는데 덧칠하고 사인한 흔적이 보인다. 변월룡은 하루에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저자인 미술평론가 문영대 박사의 말이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 10월 30일까지 <고국의 품에 안긴 거장, 변월룡> 전시가 진행 중이다. 지난 5일 전시 오프닝에서 둘러 본 작품 220여점은 한번에 다 둘러 보기에 버거울 만큼 많다. 작품들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5월에 걸쳐(탄생 100년을 맞는 이중섭, 유영국과 더불어 한국근대미술 거장전의 일환) 전시한 뒤 제주에 내려왔다. 변월룡의 국내 첫 전시였고, 제주는 서울에 이은 두 번째 전시다. 서울과 같은 전시지만, 작품 수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서울에서보다 30여점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 왜 ‘고국의 품에 안긴 거장’ 일까?

그는 1916년, 연해주 유랑촌에서 이민족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 솜씨가 발군이라 학창 시절에 자신의 교과서에 실리는 그림을 그릴 정도였다고 한다. 추후에 러시아 예술대학 레핀미술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교수를 역임한다. 그리고 그는 북한에 초청 받아 평양미술대학 설립 과정에 관여했다. 이것이 일생 단 한번의 고국 경험이다. 그때도 한국에서는 그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16세부터는 아동 도서 출판사 삽화를 담당했고, 한국 영화를 상영하던 극장의 간판, 포스터도 모두 그가 그렸다. 이후 시베리아 서쪽 끝 스베르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미술학교를 거쳐 레닌그라드 레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천부적인 재능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길을 열어준 것이다. 빛나는 재능으로 이민족이면서도 부와 명예를 누린 화가. 타이틀에 대한 의문은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전시 관람에 앞서 그의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국내 빈곤한 근대미술사를 채워 주는 변월룡, 그의 대표적인 그림 몇 점을 꼽아 천재 화가의 생을 따라가 보자. 

 

1. 레닌그라드, 본격 그림의 시작 

▲ 1943년 레닌그라드 아카데미에서 그린 드로잉, '남자의 얼굴'이다. 종이에 목탄으로 그렸다. ⓒ뉴스제주

그가 러시아 레닌그라드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하던 당시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 포화 속에 있었다.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1년, 독일은 레닌그라드 방어선을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 900일 동안 레닌그라드를 고립시켜 음식과 연료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1944년 고립된 레닌그라드 포위망이 해제되기까지 도시 인구 1/3인 100만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립된 예술아카데미는 병원으로 사용됐다.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모스크바 근교의 자고르스크로 옮겨다니며 수업을 이어갔다고 한다. '남자의 얼굴' 그림이 당시 드로잉이다. 도립미술관에서는 아카데미 입학 초기 작품 총 네 점을 볼 수 있다. 남아 있는 그의 그림 가운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그림을 보면, 그가 전쟁 중에도 대상의 해부학적 특성과 개성을 면밀히 살펴 성실하게 그림의 기초를 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50년 2학년 재학 시절 그린 손 스케치. ⓒ뉴스제주

문영대 박사는 전시 오프닝 행사로 진행된 그림 설명을 통해 당시 미술 수업 방식을 들려줬다. “1학년 수업은 두상을 주로 그린다. 2학년에 이르러서야 손을 그리게 된다. 그만큼 손 표현은 어려운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은 손이 있었기 때문에 완성된다. 손 표현은 얼굴 표현보다 어렵고 중요한 것이란 얘기다. 3학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반신상을 그리고 4학년이 되어야 두 사람 이상, 스토리가 있는 그림을 그린다.” 

변월룡은 추후 레핀 미술대학 교수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대학 측은 그에게 1학년 이상의 수업 강의를 내어주지 않는다. 문영대 박사는 다른 자리에서 “이민족으로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작용했을 거다. 결국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고국을 향한 그리움도 짙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의 인생이 곧 작품이다.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심적 방황은 추후 이어지는 그림을 통해 더 깊이 느낄 수 있다.  -2편에 이어짐.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저작권자 © 뉴스제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