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 초청을 포기하고 자화상을 통해 완전한 체념을 암시한 변월룡은 이후 러시아의 생활에 충실하려 한다. 그리고 북한 풍경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의 그림에는 소나무, 사슴, 버드나무와 바람이 등장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의 저자인 문영대 박사는 "휘둘리는 마음이 바람과 버드나무로, 고국을 향한 시선이 사슴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소나무의 경우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3. 그가 그린 바람, 사슴, 소나무의 의미

▲ 에칭 작품 '바람'이다. 작품 가득 느껴지는 바람과 섬세한 인물들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뉴스제주

고국에 돌아가기를 체념한 변월룡은 1년여 기간 동안은 활동을 하지 않는다. 전시회도 열지 않고, 오로지 대학에서 교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산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66년 즈음에 한동안 발길을 끊은 다시 연해주를 찾는다. "이때 찾는 연해주는 고국 대체지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과 연관된다. 그리고 이즈음부터는 북한이 그림에 드러나지 않는다." 문영대 박사의 말이다. 박사는 그가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는 러시아인으로 살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림 주문이 많아서 경제적으로도 불편하지 않았다. 풍족한 삶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한 러시아인으로 살 수 없었다. 실제 1학년 이상의 수업을 맡지 못했고, 이와 유사한 차별을 끊임 없이 겪었을 거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 사람들을 많이 그린다. 당시 그린 인물들은 하나같이 러시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였는데, 그가 그림으로 러시아인과의 연결점을 찾으려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즈음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는 유독 소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북한을 다녀온 이후 더욱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다. 우리에게 소나무는 가장 흔한 것이고,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는 그리기 어려운 소재다. 화가들에게는 나무의 품위와 기백을 그대로 살려 그리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그는 또 ‘바람’을 소재로 한 에칭을 많이 남긴다. 마치 '운명에 순응하면서도 굴하지 않는 삶'을 은유하는 것 같다. 작품에서 보이는 바람은 거칠고 또 세밀하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긴장감이 가득한 작품 안에 섬세한 선과 나무, 사람들, 기와집이 민감하게 다가온다. 다양한 표현, 효과를 주기 위해 작가는 원경의 산과 대기를 점묘로 표현하고, 부식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 도록은 그의 '바람' 그림을 이렇게 요약했다. “바람 시리즈를 통해 러시아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자신의 심경을 투영시켰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국적이면서 러시아인이 아니고 한민족이면서 한민족 취급을 못 받는 한 그의 바람 시리즈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의 삶은 고독과 방랑으로 점철돼 자신이 머무는 곳이 화실이요, 자신이 원치 않아도 바람이 불었다.” 

▲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사슴을 주제로 한 두 개의 작품 중 하나인 '가을'이다. 서정적인 그림이 작가의 정서를 반영한 듯 느껴진다. ⓒ뉴스제주

북한과 연해주를 그린 풍경에 소나무를 넣은 것처럼, 그는 연해주를 그릴 때 사슴을 자주 그렸다. 다소 감상적인 분위기 안에 있는 사슴들은 소박하고 순순한 인간 같기도 하고 그의 고향, 조국의 원초적인 자연 같기도 하다. 바람이나 사슴 모두 여리고 연약하다. ‘바람’ 그림에 그려진 버드나무가 정체성이자 처한 상황이라면, 사슴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란 설명이 있다. 둘 다 하나같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작가의 심경이 녹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슴을 주제로 한 십여점 작품 가운데 유화와 판화 두 점을 볼 수 있다. 

변월룡은 1990년에 74년 일기를 마감했다. 고국 방문 1년 3개월을 제외하면 냉전시대 소련에서 살다 간 작가다. 그가 죽고 불과 4개월 뒤 한국과 러시아 간에 수교가 체결된다. 그는 눈을 감기 전에 가족들에게 자신의 한글 이름을 묘지 비석에 새겨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한글 이름이 새겨진 묘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세베르노예 클라드비셰에 위치해 있다. 

▲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을 그렸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자료들 가운데, 이 그림이 당시 상황을 증명하고 있다. ⓒ뉴스제주

문영대 박사는 말한다. “그는 북한에서 본래 의도했던 3년을 절반도 못채우고 돌아왔다. 있으면서는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가 러시아에 빨리 돌아오는 바람에 그 작업이 중단된 것이 안타깝다.” 외국 어느 유명 미술관에 가도 자국을 빛낸 인물들의 그림이 많이 걸려 있다. 박사는 국내에서는 그러한 초상화를 보기가 어려운데, 그런 점에서 변월룡이 그려 남긴 인물들의 초상화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포로 송환의 경우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기록이 없던 당시 일들을 변월룡 그림 한 점이 증명하고 있다. 예술의 힘이 작용하는 범주란 이런 것이 아닌지. 문영대 박사의 말처럼 변월룡은 예술의 기록, 그 힘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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