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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이 하나둘 모여들자, 탐라 사람들의 목소리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바람의 기운은 미묘하게 거칠게 변해있었다. 어느샌가 지슬도 나와 멀찍이 떨어지더니 그들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고려군사와 탐라 사람들 사이에 선 나는 양쪽 모두 번갈아 보며 침묵을 지켰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건네지 않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욱신거리는 다리를 두드리며 양쪽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태워라!”

영암부사 곁에 선 부관이 호령하자, 고려군사들은 분주하게 성주 숙소 앞을 에워쌌다. 나중에 합류한 군사들이 기름을 끼얹기 시작하자, 탐라 사람들은 괴성을 내질렀다. 영암부사와 고려군사들은 물론이고 나 역시 그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체구가 큰 사내의 주변 사람들은 몸부림까지 선보였다. 거기다가 지슬은 눈에 날을 세운 바짝 세웠다. 왜 그러냐고 넌지시 물었으나 내 목소리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고마이십써!”

체구가 제일 큰 사내가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고 앞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시선은 금세 냉기를 일으켰다. 양쪽에서는 자연스럽게 전열 갖추기 시작했다. 이러지들 말자는 나의 외침은 그들의 발소리를 뚫고 나오질 못 했다. 어둠은 더욱더 짙게 내려앉았지만 서로 노려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뜨겁게 불타올랐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영암부사는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모두 손이 칼자루로 향했다. 탐라 사람들은 이미 각자 무기를 꽉 쥔 상태로 반 발자국 정도 나아왔다. 내가 양팔을 들고 모두 진정하라고 소리쳤으나 돌아온 건 팔뚝에 돋아난 서늘함이었다. 몸을 반대로 돌려서, 저 사람들과 대화로 진정시키자고 소리쳤으나 영암부사는 손짓만 할 뿐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만히 버티고 서자, 그의 수하들이 달려오더니 팔을 하나씩 붙잡고 끌어당겼다. 몸을 뒤로 젖혔으나 조금도 버티지 못 하고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사이 탐라 사람들 몇몇이 달려들더니, 나를 끌어내린 군사들의 목에 칼을 드리웠다.

“고마이이시라 햄써!”

영암부사를 향한 지슬의 외침은 탐라 사람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다. 그와 동시에 고려군사들은 각자 칼을 꺼내 들었다. 그들 너머로 활시위를 당긴 궁수들의 모습도 몇몇 내 눈에는 들어왔다.

“지금 무슨 짓들인가!”

영암부사가 수하들을 뒤로 물리고 한 발짝 나아갔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칼집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탐라 사람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조금 전보다는 날카롭게 세운 눈빛이 무디어졌다.

“그딘 건들지맙써.”

앞장선 그자 사람들을 도로 한 발자국 물러나게 했다. 그 역시도 무기는 바닥에 내려놓은 채. 팔뚝에 솟은 시퍼런 핏줄은 굳이 무기를 들지 않아도 혓바닥이 절로 마르게 했다. 그가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마다, 고려 군사들은 식은땀과 함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영암부사조차도 헛기침하며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가?”
“이디는 당신들 것이 아니우다!”
“썩 물러나지 못할까!”

영암부사의 눈에 핏기가 올랐다. 한껏 힘을 실은 목소리는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마저도 잠시 멈칫하게 하였다. 이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로 모은 것은 영암부사에게 더 바짝 다가가며 뱉은 그의 한마디였다.

“탐라의 왕자우다.”

고려군사들은 잠시 내려놓았던 무기를 바짝 들었고, 영암부사도 순간 칼자루로 손을 옮겼다. 내 고개를 더 갸웃하게 한 건, 지슬이었다. 언젠가 내게 왕자와 일가에 대한 증오심을 한껏 내뿜었던 당사자가 아니던가. 탐라 사람들조차 웅성거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지슬은 왕자의 뒤로 슬쩍 다가갔다.

“정녕 나를 희롱하는 건가!”

영암부사가 목소리가 끝까지 높아지기 전에 왕자는 옷 속을 뒤적거리더니 패를 보여줬다. 어두워서 내 눈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으니 분명한 건, 영암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칼을 뽑은 그는 정확히 왕자의 목을 겨누었다. 고려군사들을 붙들고 있는 탐라 사람들이 순간 움직였으나 오히려 그들을 제지한 건, 왕자였다. 전혀 반격하거나 떠는 기색 없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써게.”

고개까지 숙인 그를 내려다본 영암부사는 선뜻 칼을 거두진 못 했다. 대신 그 상태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지슬은 뒤로 물러났고 내가 영암부사 곁으로 다가가서 그나마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탐라말을 전달하였다. 대화는 나를 포함해 딱 세 사람만 들을 수 있었고 나머지는 각자 자리에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영암부사가 칼을 거두고, 붙들린 고려군사들이 풀려나서야 양쪽 사람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 성주 숙소 앞에 모였던 횃불 역시 거두어들였다. 왕자와 탐라 사람들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고 심지어 큰절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 난 영암부사 곁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과연, 왕자를 믿어도 된단 말인가.
성주의 두 아들 중 한 명인 그. 여태껏 보았던 폭정에 지쳤고, 몽골에 몰래 붙을 계획까지 세운 모습을 보고 부자지간으로서 연을 끊었다던데. 영암부사에게 이를 믿어도 되겠냐고 혼잣말처럼 넌지시 물었다. 고개를 살짝 내저은 그는, 군사들을 재정비하고 탐라 사람들까지 함께 성주청 바깥으로 이끌었다.
성주청 입구는 고려군사들이 나무로 봉인하였고 바로 앞마당에 군영이 꾸려졌다. 허락 없이 성주청에 출입하는 자, 이유를 막론하고 처결하겠다는 명을 공표한 뒤 탐라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그 와중에 지슬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영암부사는 자신의 막사로 조용히 불러냈다. 술과 고기가 약간 올라간 탁자에 그가 술잔을 채 비우지 못 한 채 앉아있었다. 마주앉은 내게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을 비워냈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핏자국이 역력했고 비린내도 떠나지 않았다. 탐라 사람들 앞에서 호령했을 때와 달리, 눈에 초점이 희미한 상태였다. 내가 채워준 잔을 다시 든 그의 손은 분명 떨고 있었다. 어찌 근심이 짙어졌냐는 물음에, 입술까지 올렸던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자가 영 마음에 걸리는군.”

그는 붙들린 수하를 풀어내고자, 왕자가 했던 말을 일단 들어는 준 것인데. 과연 성주에게 등 돌렸다고 그와 다른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전투할 때만큼은 체구에 비하면 눈에 띄는 행동이 거의 없었다. 그가 영암부사 앞으로 다가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었다. 최소한 내가 성주청에 들어가서도 봤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첩자라기엔 그의 행동이 아주 당당했고 따르는 탐라 사람들의 반응도 위화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지슬의 행동은 그동안 내가 봐 왔던 것과 자못 낯설기까지.

“좋은 방책이 없겠는가?”

다시 든 술잔을 비워낸 영암부사는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내가 병법을 익히지 않은 걸 알면서도, 질문한 저의가 무엇인지 되묻고 싶었으나 일단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빈 잔을 채우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이마를 세차게 때렸다. 내 잔을 마저 채워주던 그의 입가엔 미소까지 번졌다.

“분명 성주와 등을 돌렸다니,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야겠다.”

그게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도 연거푸 술잔을 배우고 채우며 한껏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정작 나는 술은커녕 배가 울렸음에도 고기 한 점도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탁자에 엎디어 잠이 든 영암부사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남은 술잔을 비워냈다.

날이 밝자마자 영암부사는 지난밤 해산했던 탐라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러내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전날 밤 보았던 왕자였다. 영암부사는 좀처럼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 하였다. 그것도 잠시, 성문 쪽에서 달려온 전령에게 귓속말로 보고를 받더니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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