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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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시작한 북한 공산군은 우리에게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계속 남하하여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는 보도를 듣게 되고 제주도민들도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1950년 8월 1일, 느닷없이 제주도내 기관장과 유지들을 계엄사령부 정보과에서 구속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더구나 구속된 기관장과 유지들의 면면을 보면 제주읍장 K씨, 제주지방 법원장 K씨, 제주지방 검사장 Y씨, 도청 국. 과장. 변호사, 지방유지 등등이었으니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떠도는 구속 이유가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회합을 했다는 것이다. 제주4.3사건 때 계엄령으로 크게 시달림을 받아온 제주도민들이었기에 치열한 전쟁상태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이 시국에 누구도 이 문제에 앞장서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라니......그렇지만 구속된 기관장의 면면을 보면 그런 약삭빠른 인물들이 결코 아니었으므로, 무언가 중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론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엄령 시국이라 일사천리로 사건은 처리되어 바로 총살형에 처해질 위기에 빠지니 모두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천주교 제주성당(지금의 중앙성당)신도회장 홍완표 씨와 정화의원 원장 최정숙 여사가 도내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께 사태의 심각성을 말씀드렸다. 미8군 종군신부 자격을 겸하고 있던 제주성당 주임신부인 아일랜드 출신 손 신부님(더손)과 제주성당 보좌 겸 서귀포 홍리 주임신부인 라 신부님(라이언 토마스)가 바로 그 분들이다. 신부님들은 외국인 신분임을 이용하여 로마교황청 주한대사관에 이 사태를 보고하여 외교적으로 문제를 수습해 보도록 권유하였다.
신부님들은 즉시 행동에 옮기셨고, 내무부 치안국 에서는 천주교 신자인 선우종원 과장을 제주도로 급파하여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계엄령 하여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선우종원 씨는 신분을 엿장수로 위장하여 제주도에 들어왔고, 도착 즉시 성당으로 신부님들을 찾아 뵙고 관계자들을 만나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듣게 되었다.
며칠간의 조사를 끝내고 상경한 선우종원 씨는 관계부처의 협조를 얻어 제주계엄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 대위와 제주농중(당시는 6년제)교감 K씨를 중앙군법회의에 구속기소하였으며, 구속되었던 제주지역 유지들은 사형을 불과며칠 앞둔 시점에 석방되는 행운을 얻었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건의 진실은 교원인사발령에 불만을 품은 제주온중 K교감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정보과장에게 제주지역 유지들이 인민군 환경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모임을 가졌다고 거짓 정보를 제공하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모가 알려지자 제주도민 모두가 어이없어했다. 아무리 교원인사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엉뚱한 거짓말로 기관장과 유지들을 고생시키고, 죽의 문턱까지 몰아넣었으니, 교육자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몇 년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대법원까지 올라가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미 고향인 제주에서는 그가 저지른 파렴치한 거짓말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다시, 고향땅에 발붙이지 못한 채 제주와는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지들이 수감되었을 때 벌어진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유지 L씨와 K씨를 대질신문하였다. 취조관이 K씨에게
“L씨는 인민군 환영 준비위원회 모임을 가졌다고 하는데, K씨 당신은 아니라고 주장하니 어느 말이 맞는 것인가?” 하고 호통 쳤다.
K씨는 L씨에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라고 불같이 성을 냈고, 이미 고문에 지친 L씨는 K씨에게 “적당히 그렇다고 하고 넘어갑시다.” 하고 말했다.
양 팔을 뒤로 묶인 채 끌려와 꿇어 앉아 있던 K씨는 욱하는 성질을 참을 수 없어 L씨를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몸이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한 가지 꾀를 내었다. K씨가 묶인 채로 앉아 있으면서 몸울 움찔움찔 움직여 L씨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만, 갑자기 L씨의 코를 이빨로 물어 뜯었다. 그러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갈을 외친다.
“남자 새끼가 죽을 때 죽더라도 바른 말을 하거라!”
유식했던 K씨는 고문에 시달려, 어떻게든 사건을 빨리 종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는 허위진술을 하였고, 무식하다고 소문난 K씨는 L 씨의 코를 물어뜯으면서까지 끝까지 허위진술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유식하고, 무식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이 극한상황에 다다랐을 때라야 그의 진실된 인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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