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민 역사장편소설

▲ 차영민 역사장편소설 펜안허우꽈. ⓒ뉴스제주

까마귀 한 마리가 왕자의 발 앞에 떨어졌다. 바닥에서 튄 핏물은 그의 얼굴까지 닿았다. 까마귀는 머리에 화살이 관통된 채, 피를 모두 쏟아내면서 서서히 식어갔다. 함께 공중에서 날아오르던 까마귀 무리는 굉음을 흩뿌린 채 사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왕자의 곁으로 몰려들었던 탐라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달아나듯 물러났다. 왕자는 성주청 앞마당 한가운데에서 조금 전 자신이 자리 잡은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손으로 핏물을 닦아냈다. 활을 내던지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영암부사를 똑바로 쳐다볼 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을 목에 갖다 댔으나 눈빛 하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영암부사의 눈은 초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네놈이 정녕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수다!”

왕자는 고함에 아랑곳없이 오히려 목소리를 더 키웠다. 스스로 목에 칼을 바짝 갖다 붙였다. 이를 지켜보던 탐라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모여들었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부관이 급히 팔을 뻗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척후를 내 앞으로 불러다줬다. 그사이 영암부사와 왕자 두 사람은 서로 어떤 말도 꺼내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다. 왕자의 손끝보다 영암부사가 들이민 칼끝이 더욱더 떨고 있었다.

“앞바다에 심상치 않은 게 포착되었소.”

척후는 부관의 곁으로 다가가 목을 축였다. 지금 군함 여러 척이 앞바다에 진을 친 상태라고 했다. 깃발의 색깔만 봤을 땐 고려군이 맞으나, 추가 병력이 내려온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던 터였다. 지금 영암부사가 저토록 더 노발대발하는 것은, 군함의 정체가 성주 측 병력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이 저리하실 분이 아닌데.”

곁을 오랫동안 지켜왔다던 부관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성주측 병력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냐고, 묻자마자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눈이 동그래진 내게 부관은 말없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별초군들이 본토 남부 지방 곳곳에서 고려군 깃발을 앞세워 장악해왔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 진짜 고려군과 맞닥뜨릴 때조차도 깃발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선제공격까지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다. 조정이 나를 비밀리에 여기까지 보낸 건, 성주 세력의 자체적인 모반보다는 별초군에 투항한 그 자체였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정이 예측을 한참 빗나갔다고 여겼건만. 그동안 내가 여기 있으면서 겪었던 일들만 보아도 전혀 별초군과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고. 단순히 영암부사가 몰랐던 또 다른 병력 그 자체만으로 저토록 이성을 잃을 수 있단 말인가. 반면에 왕자는 괜히 내 양팔이 저릿저릿할 만큼 전혀 표정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깔린 목소리로 먼저 대화를 걸기도 했다.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한참 주고받는 터라, 아무리 귀를 바짝 세워도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믿어보겠네!”
“나중에랑 알 게 될 거우다.”

영암부사는 천천히 칼을 거두었다. 왕자는 목에 가늘게 드러난 피를 닦아내며 탐라 사람들을 향해 엷게 웃어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서 자리를 지키던 그들은 영암부사가 뒤돌아서자마자 왕자 곁으로 모여들었다. 자세히 살펴보아도 그들 중 지슬의 모습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직접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부관이 섣부른 행동은 삼가라며 팔로 막아 세웠다. 영암부사는 주변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곧장 막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바로 따라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부관이 막더니 혼자만 들어갔다. 곧바로 터져 나온 고성에 그 역시도 금방 나오고 말았다.

“아무래도 준비해야겠군.”

부관은 내게 절대 막사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한 뒤 군사들을 마당에 모두 집결시켰다. 왕자도 모인 탐라 사람들로 대열을 맞춰서 고려 군사 옆에 세웠다. 막사에서는 영암부사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부관의 눈총을 받자마자 고려군 대열 중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동이 서서히 트기 시작할 때쯤, 영암부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은 곧장 왕자에게로 향했다.

“정녕 나를 능멸하지 않았다면, 그대가 직접 앞장서시게!”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탐라 사람들은 고려군이 따로 준비한 죽창을 하나씩 챙겨 들었다. 척후가 돌아와서 보고하자마자 영암부사가 직접 출정을 명하였다. 왕자는 탐라 사람들과 함께 선봉에 나섰다.

성주청과 가장 가까운 포구에 다다르자마자 거칠게 휘몰아치는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위에 날개를 펼친 까마귀 떼는 중심을 잃었고, 높게 부서지는 파도가 당장 그들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포구에 정박한 몇 척의 고깃배는 이미 뒤집혔고 바닷물이 땅으로 넘어오는 중이었다.

군사들은 모두 바람에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으나, 영암부사의 명을 따라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중 왕자가 직접 이끄는 탐라 사람들은 포구에 별다른 방어시설 없이 서게 했다. 파도가 순식간에 포구 깊숙한 곳까지 뒤덮었지만 영암부사는 명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왕자가 제일 먼저 앞장서서 자리를 지켰다.

고려군사들은 포구를 중심으로 풀숲과 건물 등등 은밀하게 매복하였다. 난 영암부사와 함께 가장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이마저도 장대비까지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 모두 휘청거렸다. 특히 탐라 사람들은 거의 대열이 흐트러진 채, 그 자리를 지키는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력상 탐라 사람들이 자리 잡은 위치가 좋지 않다는 부관의 말은, 영암부사의 헛기침에 공기처럼 묻히고 말았다.

“난 저들을 믿지 않느니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려군사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구조를 살펴보니, 포구 바깥 방향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에 더 집중되었다. 궁수들은 나무나 기둥에 붙어서 활시위를 당겼는데, 화살 끝이 향한 곳은 바로 탐라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포구 쪽으로 향하는 화살은 단 한 발도 없었다. 보다 못한 내가 조용히 영암부사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탐라사람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더라도, 저들은 우리와 함께 싸워준 동맹과 같은 존재가 아니냐고 물었다. 부관은 처음엔 나를 말리려다가, 자신이 풀려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탐라 사람들이었다고 말을 보탰다.

“모르는 소리!”

그러나 영암부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설령 성주와 갈라섰더라도 삼별초와 어떤 방법으로든 내통했을지 전혀 알 수 없을 상황이라 하였다. 성주는 몰라도 삼별초와 내통이란 말에 더 이상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전장을 누비며 삼별초와 동료이자 적으로 수없이 상대해본 경험이, 그의 목소리와 손을 떨게 하였다.

결국 탐라 사람들은 삼별초와 내통한 상태가 밝혀졌다면, 지금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고. 설령 모르는 사이였다가, 서로 적으로 인정하고 전투한다면 최소한 고려군 전력 보전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조용히 털어놓았다. 나는 나였지만 얼굴색이 허옇게 질린 건 바로 부관이었다.

“장군, 소인은 이 방법이 썩 내키지 않사옵니다.”

부관이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 번, 성주청에서 구해준 건 탐라 사람이라는 걸 말했다가, 뺨에 손바닥 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영암부사는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더니 한 번 더 뺨을 후려쳤다.

“혹여 대장부타령을 하고 싶은 건가? 우린 지금 전장에 있다. 한시도 긴장을 늦춰선 아니 될 것이야. 방심하는 순간, 언제 목에 칼이 들이칠지 모른단 말이다. 그대도 마찬가질세.”

부관을 바닥으로 밀어낸 영암부사의 손이 내 어깨에 올라왔다. 그사이, 군함은 비바람과 파도를 견뎌내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연 척후가 알려온 그대로 고려군의 깃발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큰북 소리가 파도보다 먼저 땅에 닿기 시작했다. 왕자의 손짓에 따라 탐라 사람들은 오로지 죽창 하나로 방어 진영을 구축하였다.

이마저도 몰아치는 비바람과 파도에 계속 흐트러지고 있었다. 고려 군사들도 각자 전열을 다시 정비하며 다가오는 군함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암부사는 오히려 왕자의 동태에 신경을 바짝 세웠다. 급기야 직접 활을 잡고 앞으로 나가더니 활시위를 바짝 당겼다. 화살은 왕자를 향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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