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임종 칼럼]보고 듣고 느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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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고부터 불과 삼 일만에 그들은 서울을 점령했다.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한다는 보도가 연일 발표되더니만 삽시간에 낙동강까지 내려와 버렸다. 이제 마산, 대구, 부산이 함락될 날도 멀지 않아. 마치 중국의 대만처럼 제주도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여리저기서 무성하게 들려왔다.
조국의 운명이 백천간두에 놓였는데, 어린 나였지만 가만히 앉아 구경할 수만은 없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낙동강 전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게주농중(당시는 6년재) 학생을 중심으로 해병대 자원입대가 늘어가고 있었다. 나도 친구와 둘이서 해병대에 지원하러 갔더니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와라.”
는 말만 듣고 입대가 허락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홧김에 육군에 지원했더니 너무나 쉽게 받아 주어 열 입곱 살인 나도 대한민국 국군이 되었다. 외아들인 내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는 전쟁터로 간다며 부모님과 친척들이 아우성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전선으로 향하는 군함에 승선하여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출발했다.
하느님이 도왔는지, 조상님의 음덕인지 나는 전선에 가자마자 1951년 2월 6일 인민군의 총알을 선물 받고 1951년 5월 23일 대한민국 국군창설 이래 처음으로 상이군인에게 수여하는 명대제대증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내가 살아서 돌아오자, 나와 같이 출정한 친구들 집에서는 나를 찾아와 아들 소식을 들으려 했고, 돌아온 나를 무척이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같은 배를 타고 출정했지만 부대배치가 달라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생사를 알 수 없어 시원한 대답을 해 드릴 수 없었다. 실망하여 돌아가는 친구 부모님의 뒷모습을 아타깝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K라는 친구집에는 전사통지서가 날아들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전사했는지는 모르나 태극기 한 장 얺은 전사자 유골상자가 배달 되었고, 비통함속에 장례를 치렀다. 그로부터 2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엽서 한 장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자세한 내용도 없었고, 밑도 끝도 없이 “다시 전선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들 K 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엽서에는 소속 부대명도 전혀 없어서 더 이상의 아무런 정보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전사통지서 받고 소상, 대상까지 다 치렸던 죽은 아들로부터 엽서가 날아들었으니, 이를 받아본 부모님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이 기뻐하셨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리 기다려도 또 다시 편지는 날아들지 않았다.
초조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었는데 1년만에야 드디어 소속부대를 밝힌 편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역시 자세한 내용은 없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정도의 안부뿐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확실히 살아있다는 것을 믿고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군에 입대한 5년만에야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전선을 누비다 보니 편지 쓸 기회도 없었지만, 군에서 자세한 내용을 적을 수도 없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지나온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K는 내가 부상당할 그 무렵에 인민군에게 생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생포한 국군을 모두 인민군으로 입대시켜 최정선의 총알받이로 활용했고, 그래서 K도 그 속에 끼어 강제로 인민군이 되고 말았다. 인민군이 된 K는 기회를 보아 탈출하려고 호시탐탐 노렸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은 채 1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는 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 틈을 타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국군부대가 아니라 유엔군 부대에 생포되어 이번에는 인민군포로 신세가 되었다. 미군측에 자신이 국군이었고, 소숙부대와 군번까지 밝히며 아무리 설명해 보았지만, 후방에 가서 말하라고 묵살당하며 후송된 곳이 바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와 보니, 이 곳은 완전히 인민공화국 천지인지라 함부로 국군이었다는 말을 발설했다가는 인민재판에 의해 즉결처형당할 위기에 몰릴 수도 잇게 생겼다. 어떡하면 이 포로수요소를 탈출하여 살아남느냐 하는 새로운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보급품을 인수받는 사역병으로 지원하는 날마다 정문으로 나아가 보급품을 인수받는 역할을 도맡았다.
매일같이 눈치를 보다가 조그만한 쪽지에야 『나, 아무개는 국군 출신인데 억울하게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 원 부대는 어느 부대이고, 군번은 몇 번이다. 다음 보급품 수령 차 나올 기회를 틈타 탈출할 예정이ㅣ니, 총으로 쏘지 말고 내 신병을 인수해 달라.』고 써서 뚤뚤 말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니다가 기회를 보아 위병소 헌병옆을 스치고 자나가며 슬쩍 쪽지를 떨어뜨렸다. 헌병도 어떤 낌새를 눈치 챘는지 잽싸게 그 쪽지를 밟고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는 척 했다.
다음날 보급품 수령차 나왔는데, 어제 그 헌병이 아니어서 실망하고 되돌아갔다. 다시 또 하루가 지나 다음날 나와보니 그 헌병이 나와 있었고, 눈을 마주치자 엷은 미소를 지으며 탈출해도 좋다는 눈치를 보였다. 보급품 수령이 거의 끝나갈 무렵 K는 갑자기 정문 밖으로 뛰쳐나와 수송소를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그는 헌병대로 끌려갔는데 그동안 그들은 국방부에 이미 조회하여 K의 신원확인을 끝내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또 다시 전선으로 향하면서 엽서 한 장을 겨우 구해 간신히 집으로 소식을 띄운 후 전선으로 향했던 것이다. 국군에서 인민군으로, 인민군에서 프로로 그리고 다시 국군으로 돌아온 그는 만기 제대할 때까지 원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그는 남북을 넘나들면서 군 복무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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